고(故) 이영만군의 엄마 이미경씨(58)는 청재킷 안에 받쳐 입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여러 개 풀어뒀다. 역할을 마치면 무대 뒤로 돌아와 붉은 반짝이 드레스로 곧장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록 털이 박힌 몬스터 '오크' 옷도, 가죽점퍼의 깡패 차림도 이씨가 소화한다. 이씨는 이날 연극에서 총 7개 역할을 맡았다.
리허설 무대에 나서기 직전 이씨는 "노래 연습을 못했어"라며 "의자는 어디있지?"라고 허둥지둥했다. 곧이어 무대에 서자 떠는 기색이 사라졌다. 얼굴에 금세 웃음을 지었다. 무대 바닥에 표시된 형광 테이프를 따라 동선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마이크 하나 없이 성량으로 객석 138석 무대를 꽉 채웠다.
이씨는 결성 9년 차로 접어든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의 배우다. 이씨를 비롯해 수인 엄마 김명임(60), 동수 엄마 김도현(50), 예진 엄마 박유신(52), 순범 엄마 최지영(60), 윤민 엄마 박혜영(61), 생존자 가족인 애진 엄마 김순덕씨(54)가 함께 무대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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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대본에 적힌 글귀…"나는 할 수 있다"━
극단에 들어오기까지 고민이 깊었다. 작은 몸으로 19박20일에 걸친 세월호 도보행진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 갔다가도 서울에 돌아와 청와대, 국회를 다녔다. 단식 투쟁에 참여하고 삭발도 했다. 피켓 시위에도 빠지지 않았다.
2017년 세월호가 인양된 후에야 극단에 합류했다. 다른 엄마들이 녹음해준 대사를 집에서, 차에서 들으며 외웠다. 10주기를 앞둔 지금은 충남 홍성 집에서 밭일을 하다가도 안산에 와 주 2회 연극 연습을 소화할 정도로 진심이지만 "집안일에 손도 못 대. 할 일이 너무 많아 피곤해 죽겠어"라며 퉁명스러운 척했다. 엄마들은 그런 최씨에게 "언니한테 장거리상, 노력상 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암기에 자신이 없다는 최씨가 든 대본은 꾸깃꾸깃했다. '순범 어머니의 이야기. 어떤 밤'이라는 제목 위에 그는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적었다. 참사 이후 10년간 밤마다 일기장에 "순범아, 엄마 할 수 있지. 엄마 믿지"라고 써왔다고 말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도 잠시, 최씨는 "오늘이 공연이니까 팩도 하고 자야 하고 안 하던 마스카라도 해야 하고 루즈도 발라야 하는데 어제는 피곤해서 못 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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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기, 아이들 이름 처음 등장…관객들 138석 넘게 모여━
극단 노란리본은 지난 6일 오후 2시 경기 안산시 문화예술의전당 별무리 극장에서 4월 연극제 개막작을 올렸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노란리본은 창단 이래 5번째 연극 '연속, 극'을 준비했다. 극을 구성하는 7개의 에피소드는 엄마들 각자가 마련한 자기 이야기다.
앞서 올린 4편의 연극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엄마들은 이날 연극에서 처음으로 아이들을 등장시켰다. 이미경씨가 김명임씨의 아들 수인군을 연기하고 김순덕씨가 박혜영씨의 딸 윤민양과 김도현씨의 아들 동수군 역할을 맡았다. 엄마들은 각자 이야기에서 주연으로 다른 엄마 이야기에서 조연으로 활약했다.
연극 시작 20분 전. 예진 엄마 박유신씨가 공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분장을 정돈했다. 그는 "긴장돼요. 떨려요. 사람이 많이 오네"라며 "4월이면 우리 힘내라고 다들 관심 가져주시는 거 같다"고 말했다. 엄마들이 떨려 하는 사이 극장 바깥에 관객들이 몰려왔다. 총 138석 극장에 관객 160명이 찾아왔다.
서울 구로구에서 극장을 찾은 고다연씨(26)는 "노란리본 공연 준비 과정을 담은 영화 '장기자랑'을 보고 어머님들 연극을 보고 싶었다"며 "친구랑 4월을 맞아서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연극을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참사 당시 단원고 1학년생이었다는 김응훈씨(26)는 "사람들이 봄철 꽃 피는 것을 보러 갈 때 나는 그때가 생각난다"며 "관객으로 왔지만 다른 관객들이 많이 온 것을 보며 마음이 조금 위로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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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치며 "진짜 웃기네"…웃음, 눈물 함께한 세월호 연극━
첫번째 연극 말미, 김씨가 독백으로 "엄마는 게임을 하는 것보다 너랑 시간 보낼 수 있어서 좋았어. 아직도 엄마 친구 목록에 네가 있어"라며 "내 친구 동수야. 엄마 심심해. 나랑 모험 가자"고 하자 한 관객은 휴대용 티슈를 가방에서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어 김명임, 최지영, 박유신, 이미경, 박혜영, 김순덕씨의 무대가 이어졌다. 관객들은 깔깔 웃다가도 흐르는 눈물을 닦고 콧물을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연극이 모두 끝난 오후 4시30분쯤 관객들은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엄마들이 인사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위해 밖으로 나선 뒤에야 극장을 빠져나갔다.
2015년 연극 모임 시절부터 노란리본과 함께한 김태현 감독은 "엄마들을 처음 봤을 때 일상을 살 힘이 없어 보여서 일부러 코미디 대본만 가져왔다"며 "한계는 있겠지만 얼굴이 다들 밝아지고 있다. 지금은 다들 주인공을 하고 싶어 한다. 엄마들이 관객과 서로 호응할 때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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