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2000명 증원책'을 놓고, 정부와 의사들이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가는 가운데, 정작 이번 논의에서 '의과학자(의사이면서 과학자) 인력 부족' 문제는 쏙 빠진 모양새다. 정부와의 기 싸움에 나선 의사 집단 대부분이 병원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사로 구성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의과학자를 지금보다 더 많이 배출해야 하는 건 맞다"면서도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의과학자가 많아지는 건 아니다"라는 게 의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의과학자의 길을 걷는 가천대 의대 길병원 신경외과 이언 명예교수(이메디헬스케어 대표)는 "의과학자를 더 많이 배출하기 위해선 의대 정원부터 늘릴 게 아니라, 의사들이 과학을 연구하고 싶도록 환경을 만드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을 연구하고 싶은 환경이 아닌데 의대 정원 늘린다고 의과학자의 길을 가려는 사람이 많겠냐는 것이다.
이 명예교수는 길병원 인공지능기반정밀의료추진단장으로 몸 담았던 2016년 당시, 국내 최초로 IBM의 인공지능 의사 '왓슨 포 온 콜로지'를 길병원에 도입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로선 의사 중에서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공부하며 IT·인공지능 등 최첨단 과학기술을 터득하는 데 그친다"며 "의과학 연구 환경이 조성된 후 의대 커리큘럼에 과학을 녹여 의대인지 과학인지 헷갈릴 정도가 돼야 의과학자 양성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해외에선 이미 다양한 의사과학자 양성 모델이 활발히 도입되고 있다. '의사는 평생 환자 수만 명을 치료하지만 의과학자(MD-phD)는 수억 명을 살릴 수 있다'는 데 주목해서다. 미국 칼 일리노이 공대는 세계 최초로 공학 기반 의대를 설립해 공학 원리를 적용한 의학을 교육한다. 또 하버드의대는 1971년 기존의 의대교육 과정과 별도로 MIT와 공동 운영하는 HST(Health Science and Technology)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은 기존 의대를 운영하면서 연구 프로젝트 중심의 'Duke-NUS 메디컬 스쿨'을 신설해 기초의학 기반 의과학자와 공학·과학 기반 의과학자 양성을 병행하고 있다.
의대 증원을 늘려 의과학자까지 늘린다고 해도 의과학자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란 견해다. 필수의료·지방의료·의과학자 모두 다 '어려우면서도 돈이 안 되는 분야'라는 게 의사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최 교수는 "의과학자의 여건을 개선하지 않은 채 의대 정원부터 늘려 의사 인력이 많아지면 '편한 분야'로 더 많이 지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의학전문대학원 졸업자 가운데 의학 연구에 종사하는 인력보다 개원하는 사례가 훨씬 더 많다는 게 이를 입증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또 다른 의과학자 A 교수도 "돈 안 되고 힘들면 누가 의과학자의 길을 가려 하겠는가"라며 "이공계생들이 이공계 연구가 열악하고 대우가 나빠 떠나려는 상황에서, 의과학자를 양성한다는 건 의사에게 이공계를 하라고 떠맡기는 격인데 누가 지원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저작권자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