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개혁을 잠식한다 [광화문]

머니투데이 양영권 사회부장 | 2024.04.03 05:00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은 타인을 불안에 몰아넣는 것이다. 16세기 마키아벨리의 말이지만 21세기에도 통한다.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정책에 반발해 의사들이 병원을 비웠다. 국민 불안을 고조시키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처음 의대 정원 확대를 제시했을 때 지지를 보내던 국민은 사태가 2달 가까이 지속되며 문을 닫는 대형병원 병동이 늘어가자 불안감이 커졌다.

인기 없는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에 등을 돌리는 사람이 늘면 문재인 정부가 의대 정원 400명 확대를 시도하다 철회한 것처럼 실패한 개혁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의사를 이기지 못한다"는 어떤 의사의 발언은 국민 불안에 대한 책임은 결국 정권이 져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근 군 단위 지역에서 33개월 어린아이가 큰 병원 여러 곳의 문을 두드리다가 거부당한 뒤 숨진 사태까지 벌어져 불안은 가중됐다. 의사 이탈 때문이라면 이런 문제를 충분히 예견했을 텐데도 집단행동에 나선 게 야속하다. 의사 이탈 때문이 아니라면 지방 응급의료 체계가 부실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 개혁의 필요성을 방증한다.

우리 시대 평범한 사람들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병원 중환자실에서 삶을 마감한다. 시작과 끝을 의사에게 맡긴다. 의사는 그런 이유만으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의대에 최상위 수재들이 몰리는 게 그런 숭고한 역할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이과 계열 고등학생 1등부터 3058등까지가 모두 그런 숭고한 희생정신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의술이 높은 지적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수학능력 상위 0.1%만 그것을 습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필요한 가설이 없고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법칙은 과학이론과 논리학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이 법칙을 따르자면 단순히 의사가 안정적으로 장기간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직업이고, 배출 인원도 묶어둬 기득권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의대의 인기가 높다고 보는 게 맞다.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인간으로서 입학하는 순간 미래가 보장되는 의대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의대 졸업 뒤 전문과목 선택에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기준도 '수입'이다. 기대수익이 높은 곳에 수요가 몰린다. 수익을 추구하지 않고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는 의사들이 많지만 정책은 항상 그것을 악용하는 이들을 전제하고 만들어야 한다.


지방 의료원에서 연봉 4억원을 준다고 해도 의사를 모실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도 시장의 원리인 수요공급 법칙으로 보는 게 단순하다. 의사의 공급이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학창 시절 배운 수요공급곡선을 그려보면 공급이 탄력적이지 않을 때 수요가 조금만 커져도 가격은 급하게 상승한다. 의사 공급이 충분하다면 소위 돈 잘 버는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은 레드오션이 될 것이고, 이는 서비스 단가 하락과 의사 수입 감소로 이어져 지방 의료원이나 흉부외과 지원율을 높일 것이다.

의료 산업에 시장 논리를 전면 도입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불합리한 구조를 고치는 방법은 시장 기능을 일부 회복시켜주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말대로 시장이 만능은 아니지만 해악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인 것만은 분명하다. 의대 증원은 왜곡된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시장 기능을 끌어들이는 시도다. 이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수험생 가족 이주로 지방에 활력을 불어넣는 부수적 효과도 누릴 수 있다.

의사 이탈에 국민 불안이 큰 것은 그만큼 모순이 크다는 얘기다. 모순은 저절로 해소되지 않고 항상 차곡차곡 쌓이는 법이다. 오히려 복리의 이자가 붙고 자신만의 생태계를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그 모순을 해결하는 데 더 큰 고통이 동반된다. 의사 집단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그래서 이미 개혁이 불가능한 상태가 돼 버렸다고 믿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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