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한 바위 절벽에 '弼雲臺'(필운대)라고 새기고 붉은색을 칠했다. 백사 이항복(1556~1618년)의 글씨로 전하는 필운대 각석(刻石)이 집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는 한참 전에 들어 알고 있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궁금하긴 했으나 찾아나설 계기가 없어 그저 머릿속에만 있던 터다. 아이의 졸업식, 교실로 향하는 복도 창문 너머로 이곳을 마주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뜻밖의 발견에 기뻐서, 또 다음에는 들어올 기회가 없을 듯해 가족들에게 잠깐 교실 뒷마당에 들렀다 가자고 했다. 그러자 딸이 "어, 거기 고양이 밥 주는 덴데 거기는 왜"라고 한다. 아이가 고양이와 작별하는 동안 나는 글자를 보며 사진을 찍었다.
필운대 각석 주변에는 이때 함께 새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각석이 2개 더 있었다. 하나는 시(詩)고 다른 하나는 여기에 글자를 새긴 사람들의 명단이다. 시를 남긴 사람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년)이다.
'우리 선조 옛집에 후손이 찾아오니(我祖舊居後裔尋) 푸른 소나무 석벽에 흰 구름 깊어(蒼松石壁白雲深) 백 년 세월에도 유풍은 사라지지 않았으니(遺風不盡百年久) 어르신들의 의관도 여전하구나(父老衣冠古亦今).'
필운대는 이항복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이유원이 '우리 선조의 옛집'이라 한 것은 그가 이항복의 9세손이기 때문이다. 이항복 또는 그의 후손이 언제 이곳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터는 이후 서울의 대표적 경승지로 이름을 날렸다.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誌)에서 서울의 상춘(賞春) 명소 4곳 가운데 하나로 '필운대의 살구꽃'을 꼽았고 그의 아들 유본예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성안에서 으뜸으로 치는 꽃놀이 장소'라고 했다. 또 박지원은 '필운대 꽃구경'이란 시에서 '사람들이 나비마냥 꽃 한 번 보려고 달려든다'고 했다. 살구꽃은 대표적 봄꽃으로 단아하기가 매화와 같고 화려하기로 벚꽃과 짝한다. 봄날 살구꽃을 보고 있노라면 공자가 괜히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기른 게 아니었구나 싶다. 필운대 살구꽃은 봄마다 많은 시인과 묵객을 불러모았고 그 발자취는 시가 됐다.
며칠 전 박물관 기증관에서 이항복의 초상화를 봤다. 몇 년 전 종가가 기증한 유물을 올해 초 기증관을 새로 열며 선보인 것이다. 실은 필운대가 다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동료의 설명에 따르면 초상화 속 이항복은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데 이는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수심에 잠긴 표정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을 겪고 그 상흔을 극복해야 했던 재상의 모습을 화가는 그대로 담아 전했다. 이항복은 시문을 잘 쓰기로도 유명했는데 그의 문집 어디에도 살구꽃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당시까지 살구나무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살구꽃조차 눈에 담을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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