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 윗면을 유심히 살펴봤다. '오돌도돌' 작고 동그랗게 튀어나온 게 보였다. 점자였다. 시각장애인이 손으로 더듬어 읽을 수 있게 만든, 그들을 위한 글자.
점자표를 참고해 읽어봤다. 20년 먹은 맥주엔 이리 쓰여 있었다. '맥주'. 그게 다였다. 시각장애인이 고른다고 상상해봤다. 점자를 더듬어 읽을 거다. 애써 살펴보니 이리 적혀 있다. '맥주.' 무슨 맥주? 알 길이 전혀 없는.
어떻게 이렇게만 달랑 써놓았을까. 오래 써온 정이 떨어졌다.
진열된 모든 맥주캔의 윗면을 봤다. 어떤 건 아예 점자도 없었다. 그밖엔 다 '맥주'라고만 쓰여 있었다. 딱 하나의 브랜드만 제외하고.
그 맥주는 단 한 번도 안 먹어본 제품이었다. 그걸 집어 장바구니에 넣었다. 시각장애인을 조금 더 생각했단 이유로. 그런 이유로 맥주를 산 건 처음이었다.
그리 소비하는 나만의 기준을, 소위 말해 '줏대(자기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를 세워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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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 고르는데 '1시간' ━
어디서 만든 떡볶이인지 봤다. 보통 '브랜드'가 전면에 쓰여 있는데, 포장을 두루 살피면 만든 기업을 알 수 있다. 특정 기업을 비판하거나 옹호할 의도가 없으므로 익명으로 쓴다.
A기업 떡볶이는 장점이 있었다. 제품에 인쇄된 QR코드를 찍으니, 성분이 뭔지 설명이 자세하게 나왔다. 예컨대, '효모추출물분말'을 누르니 빵, 맥주, 포도주를 만드는 미생물이 효모인데, 감칠맛을 높이는 역할이라 알려주는.
그러나 자세히 찾아보니, 노동자 문제와 관련해 부실 대처를 했단다.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에 대한 징계, 공장 내 사고 책임에 대한 선 긋기 등이었다. 손에 쥔 떡볶이 봉지를 내려놓았다.
C기업 떡볶이. 10년 전쯤에 해당 기업 공장에서 일하던 고교생이 자살했다. 가해자는 회사 동료였다. 산재가 인정됐으나, 사측이 어떤 징계를 했는진 파악하기 힘들었다. 애매해서 고민했다.
떡볶이 판매대 앞에 서서, 검색하느라 1시간이 훌쩍 흘렀다. 여긴 이래서, 저긴 저래서, 걸리는 게 다 있었다. 어차피 정답은 없으니 내 기준을 정하기로 했다. C기업 떡볶이를 골랐다. 지역에서 쌀 식품을 만드는 업체와 협력한단 점, 그 지역 업체 역시 사회 공헌을 꾸준히 해온 점 등을 고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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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를 만드는 '기업 마인드'가 좋아서━
A기업은 홀로 사는 어르신 고독사 예방을 위해 애쓰고 있다. 어르신 댁에 우유를 배달하고, 2개 이상 쌓이면 무슨 일이 있는 걸로 파악해 본사에서 확인한다. 그러니 행여 홀로 사는 이가 숨져도 빠르게 발견해 존엄을 지킬 수 있다. 이를 위해 특정 브랜드 우유 매출 1%를 기부한다.
또 다른 우유를 만드는 B기업. 여기는 본사가 직원과 대리점을 대상으로 갑질한 사건부터 논란이 다양하게 불거진 터라, 큰 고민 없이 배제했다.
C기업은 '동물 복지'를 신경 쓴다고 해서 잠시 살펴봤다. 동물 복지 인증 기준을 통과했고, 농약과 항생제를 쓰지 않는다고 나와 있었다. 이리저리 검색하니, 목장 사진이 나왔고 환경이 괜찮아 보였다. 실제 맞는지 농림축산검역본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인증받은 걸 확인했다. 다만 '자유 방목'을 하는 다른 곳이 있길래, 추후 거길 살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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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션은 고민하다 결국 못 사고━
화장품 판매대에 진열된 제품이 너무 많아 혼란스러웠다. 역시 앞에 멀뚱히 서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동물 실험'을 안 하는 화장품을 '크루얼티 프리'라고 한단다. '동물성 성분'을 안 쓰는 건 '비건'이다. 둘은 다르다.
A기업 로션을 들고, 뒷면에 빼곡히 적힌 성분을 들여다봤다.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오리무중. 화장품 회사 상담센터에 전화해 물었다.
"OO 로션을 사기 전에 여쭤보는데요."(기자)
"네, 고객님. 말씀하세요."(상담원님)
"혹시…이 로션이 동물 실험을 한 제품일까요?"(기자)
찾는 과정에서 알게 된 화장품들이 많았다. 동물 실험을 안 하거나, 비건 인증을 받았거나, 공정 무역을 통해 얻은 성분을 쓰거나. 그걸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쓰던 것만 썼다. 흥미 가는 화장품이 마트에 없어서,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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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에게 직접 산 '달걀'…닭들 맘껏 뛰게 하는 농장━
마트를 나오며 이 또한 제한된 '선택지'란 생각이 들었다. 시야를 좀 더 넓혀보기로 했다. 익숙하고 편한 프레임 바깥으로.
'마르쉐 농부 시장'에 갔었다(추후 상세히 다룰 예정). 생산자인 농부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어 좋았다. 농부들은 진심이었다. 어찌 농사를 지었는지, 어떻게 땀 흘려 키우고 수확했는지, 어떤 음식으로 만들어야 맛난지 들려주었다. 단지 물건과 돈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그 너머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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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비엔 '생각할 시간'이 꽤 필요하다━
새삼 알아챘다. 소비할 때 '생각할 시간'이 제외해 왔단 걸. 왜 그랬을까. 무의식적으로, 가성비가 좋아서, 어디 브랜드 제품이어서, 검색하니 리뷰가 제일 많이 나와서, 누가 좋다고 해서, 유명한 사람이 써서, 보기 좋고 끌려서.
'이거 어느 기업 제품이지?'
'이 기업은 그동안 문제가 없었나?'
'제품 성분은 좋은 게 들었나?'
'비인간 동물과 환경을 고려해 만든 건가?'
그런데 찾는 사이에 몰랐던 선택지가 많이 보였다. 더 나은 방식으로, 더 신중하고 섬세하게, 더 소비자를 생각하는 진심으로 만드는 제품과 기업들이. 당연하게도 그건 저절로 알려주는 게 아녔다. 내 수고로움을 더하여 생각해야만 가능한 거였다.
그럼 안 살 거라고. 반대로, 그런 걸 신경 쓰면 기꺼이 사겠다고. 소통이 잘 되어 기업 하나하나가 바뀌면 기쁠 거라고.
그러나 갖은 상술에 휩쓸리던 날들이 길었다. 세계적인 브랜딩 권위자, 마틴 린드스트롬은 저서 '누가 내 지갑을 조종하는가'에서 이리 적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마케팅과 광고 세상에서 우연이란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케터와 광고업체들이 소비자를 압박하고 부추기고 유혹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많은 속임수와 음모, 그리고 거짓과 조작을 확인했다.'
이젠 소비할 때마다 시간을 들여 애써볼 거다. 나만의 '줏대' 비슷한 걸 만들기 위하여.
6시간에 걸쳐 대형마트에 머물다, 다 사고 돌아갈 참이었다.
과자 코너를 지나갔다. 인기가 많은, 과자 매대만 텅 비어 있는 걸 봤다.
그런데 마침 마트 직원분께서, 그 과자를 상자째 가져와 채우고 있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냉큼 하나를 집었다.
애초 계획에 없던 거였다. 관심 있던 것도 아녔다. 그런데도 샀다. 이유를 곰곰이 스스로 물었다. 왠지 사기 어려운 귀한 것 같아서, 보일 때 안 사면 못 먹을 것 같아서, 관심 없는데도 사버렸다고.
때마침 지구와 환경을 생각하는 잡지를 만드는, 김현성 오보이 편집장이 쓴 좋은 글이 생각났다. 생각하는 소비. 그 첫 질문은 아무래도 이걸로 정하는 게 맞는 것 같아 챙겨왔다.
'사기 전에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인지 한 번만 더 생각해보고 결정하세요.'
촌철살인이 이어졌다.
'오늘 꼭 뭔가를 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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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마다 다양한 소비 기준을 세워두고 고민하는, 소비자들 실제 이야기도 자세히 취재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말에 나갈 예정인 '체헐리즘 뒷이야기'에 담겠습니다. 그럼 여러 판단을 세우시는 데에 도움이 되실 거예요. 소비자가 기업과 제품을 상세히 바라보고, 기업이 소비자에게 긴장하며 더 나아지는 선순환을 기대하며 썼습니다. 긴 기사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남형도 기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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