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을 쓰려는 드라마 속 서자들, 재미 견인하는 고난을 견뎌라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 2024.03.12 11:42

'로얄로더' '웨딩임파서블' ‘재벌X형사’ 등 혼외자들이 쏟아지는 이유

'로얄 로더', 사진=디즈니+


한국 드라마의 재벌 사랑은 유난하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에도 ‘재벌X형사’ ‘웨딩 임파서블’ ‘로얄로더’ ‘눈물의 여왕’ 등 재벌가를 배경으로 한 미니시리즈가 수두룩하고, ‘효심이네 각자도생’ ‘세 번째 결혼’ ‘피도 눈물도 없이’ 같은 주말드라마와 일일드라마에도 빠지지 않고 재벌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재벌가를 다룬 드라마에서 또 빠지지 않는 것이 흔히 재벌가 혼외자다. 공교롭게도 ‘재벌X형사’ ‘웨딩 임파서블’ ‘로얄로더’에서 혼외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드라마의 장르는 다르지만 주인공들이 재벌가 혼외자라는 점이 드라마의 서사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먼저 세 명의 주인공이 재벌가 왕좌를 차지하고 인생역전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내거는,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로얄로더’를 보자. ‘왕도를 걷는 자’란 뜻의 ‘Royalroader’를 제목으로 내세운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 최고 재벌 강오그룹 강중모 회장(최진호)의 혼외자 강인하(이준영)을 강오그룹 회장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의기투합한 밑바닥 출신 한태오(이재욱)와 나혜원(홍수주)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야기를 이끌고 판을 만드는 인물은 단연 킹메이커인 한태오지만, 전국 상위 0.1%의 빼어난 두뇌를 지닌 한태오는 자신이 직접 왕(그룹 회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자지만 왕의 핏줄인 강인하를 내세워 높이 올라가고자 한다. 아무리 빼어나도 재벌 그룹의 회장이 능력으로 차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에서다. 강중모 회장의 자식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본가 식구들과 따로 살고 가족 취급 못 받는 강인하는 그간 숱하게 보아온 천덕꾸러기이자 아픈 상처를 간직한 채 반란을 꿈꾸는 서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아낸다.


tvN 드라마 ‘웨딩 임파서블’에도 재벌가 혼외자인 이도한(김도완)과 이지한(문상민) 형제가 나온다. 재미난 건 이들 형제가 통상적으로 보이는 재벌가 남성의 혼외자가 아니라 재벌가 여성의 혼외자라는 점. 이도한과 이지한 형제는 극중 오래 전 사망한 LJ그룹 현수현 사장의 자식이다. 현수현은 LJ그룹 총수인 현대호 회장(권해효)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최중찬(전진기)과 정략결혼해 최승아(박아인)와 최민웅(홍인) 남매를 두었으나 애초부터 사랑했던 이도한•이지한의 부친과 도망쳐 살림을 차리고 도한과 지한 형제를 혼외자식으로 두게 된다. 드라마에서 현대호 회장이 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난 적손녀, 적손자인 최승아와 최민웅 남매를 후계자에서 배제하는 이유는 그들이 갖가지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등 능력부족인 탓으로 그려지지만, 현 회장의 속내에는 죽은 딸이 불륜일지언정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와의 사이에서 둔 이도한•이지한 형제에 대한 애틋함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2화에서 현 회장은 혼외자인 이도한을 후계자로 선언하지만, 이들 형제 또한 혼외자라는 리스크 때문에 그간 대중에 공식적으로 존재가 감춰졌었고, 지한이 이부 남매인 최승아에게 뺨을 맞고도 별다른 대응을 못하는 모습 등 수모도 적잖이 많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웨딩 임파서블', 사진=tvN


SBS 드라마 ‘재벌X형사’의 주인공 진이수(안보현)는 한수그룹 진명철 회장(장현성)의 혼외자다. 혼외자이긴 하지만 대중에게는 엄연한 재벌3세이자 노는 데 목숨 건 금수저 인플루언서로 일찌감치 뇌리에 박혀 있을 만큼 ‘로얄로더’의 강인하나 ‘웨딩 임파서블’의 이도한•이지한 형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진명철 회장의 부인인 조희자(전혜진)에게 대놓고 멸시를 당하고 진명철 회장에게 골칫덩이로 여겨지는 모습을 보면 전형적인 서자의 위치인가 싶지만, 진이수는 조희자에게도 따박따박 맞서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통상적이라면 경쟁 관계일 이복형 진승주 부회장(곽시양)과도 사이가 좋다.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며 정계 진출 야심을 드러낸 진명철 회장도 자신의 커리어 때문에 사고뭉치인 진이수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뿐, 진이수의 모친 김선영(이시아)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으로 나온다. 게다가 진이수는 한수그룹이 지닌 자산과 힘을 자신의 재미나 직업(경찰)을 위해 이용할지언정 그룹의 후계자 자리에는 일절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점도 ‘로얄로더’ ‘웨딩 임파서블’과는 차이점을 보인다.



재벌가가 주요 배경이거나 주요 인물로 그려질 때, 그룹의 패권인 경영권을 두고 온갖 음모와 암투가 벌어지는 모습은 흔하다. 특히 혼외자가 섞여 있을 경우 그 잔혹함과 혹독함은 한층 더 매서워지는데, 경영권을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부와 권력 앞에서 친부모형제 간도 적이 되는 형국에 하물며 어머니나 아버지가 다른 이복형제이면 더할밖에. ‘사랑의 불시착’에서 후계자에 낙점될 것으로 보이는 윤세리(손예진)를 죽이려 사주한 건 이복오빠였고,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순양그룹의 장남 진영기(윤제문)는 자신의 이복남동생 진윤기의 아들 진도준(송중기)의 사고사를 사주하며 걸림돌을 제거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이쯤 되면 대놓고 적자와 서자라는 표현을 썼던 2013년 드라마 ‘상속자들’은 귀여운 수준이다. ‘상속자들’에서 적자인 김원(최진혁)은 자신과 경쟁 관계에 놓인 서자 김탄(이민호)을 미국으로 유배(!) 보내며 견제하긴 했으나 끝내 뜨거운 형제애를 무시하진 못했으니까.


''재벌X형사', 사진=SBS


재벌가 부계 혈통주의의 클리셰를 조금이나마 부쉈던 드라마 ‘마인’도 있었지만 여전히 재벌가 드라마에선 시대를 역행하는 장면들이 대거 등장한다. 조선시대도 아닌데 여전히 축첩이 인정되고, 적자와 서자의 갈등이 공공연하다는 점이 조금 우습긴 하다. 그러나 어쩌겠나. 우리는 왕실의 권력암투를 그린 사극으로 단련된 국민 아니던가. 왕관을 쓰려거나 혹은 전복시키려는 서자들의 반란을 지켜보는 건 우리에게 익숙한 일이다. 후궁 소생 광해군이나 영조 같은 인물은 물론이고, 적자였지만 이복형제 간에 살육을 벌였던 이방원의 스토리가 여전히 뇌리에 가득한 민족이니 재벌가 적자•서자 전쟁도 재미날밖에.


‘로얄로더’의 강인하는 한태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존재를 대내외에 드러내는 중이고, ‘웨딩 임파서블’의 이지한은 형 이도한을 후계자 자리에 안착시키고자 형에게 어울리지 않는 예비 형수 나아정(진종서)을 유혹해서 떼내려 고군분투 중이다. ‘로얄로더’는 스릴러 드라마의 분위기를 풍기고, ‘웨딩 임파서블’은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지만 두 작품 모두 재벌가 혼외자가 왕의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보인다는 점은 같다. ‘재벌X형사’의 진이수는 왕의 자리에 관심이 없지만 자신의 친모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헤치면서 아버지나 아버지의 후계자인 이복형에 치명상을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란의 서자라는 포지션은 비슷하다. 왕관을 쓰거나 왕관을 전복시키려는 서자들의 활약은 계속된다.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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