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프랑스 콧털 건드렸다"…낙태권 최초 헌법화 뒤엔

머니투데이 김희정 기자 | 2024.03.05 16:10

프랑스 16년 만에 개헌, '낙태의 자유' 헌법에 명시…
극우 정당도 찬성, 8일 '세계 여성의 날' 헌법에 새겨
미국 대법원 판결 뒤집히자 프랑스의원들 똘똘 뭉쳐

프랑스 상·하원 의원들이 4일(현지시간) 파리 인근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특별 합동회의에서 낙태 자유 보장을 담은 헌법 개헌안이 가결되자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다. 헌법에 낙태권이 명시된 건 세계 최초다. /사진=로이터통신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며, 누구도 대신 처분할 권리가 없다는 메시지를 세계 모든 여성들에게 보냅니다."(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

프랑스가 여성의 낙태권을 세계 최초로 헌법에 명시했다. 낙태권을 헌법으로 보장한 것도 프랑스답지만 과정은 더 우아하다. 마린르펜의 극우 국민전선당과 보수 공화당 등 어느 반대 정당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X(옛 트위터)에 "프랑스의 자존심"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프랑스 의회는 4일(현지시간) 여성의 낙태할 자유를 명시한 헌법 개정안을 780대 72로 승인했다. 이날 프랑스 상·하원 의원들은 파리 인근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특별합동회의에서 낙태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개헌안이 가결되자 기립박수를 쳤다. 회의장의 여성의원들은 물론 프랑스 전역이 환호했다.


'세계 여성의 날' 앞둔 프랑스의 선물


개헌에 따라 프랑스 헌법 제34조에는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으로 정한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수정안은 낙태를 의회의 법률에 의해 감독되는 "보장된 자유"로 선언했다. 이는 앞으로 임신 14주까지 여성이 원하는 경우 낙태를 지원하도록 한 현행법을 "대폭 수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4일(현지시간)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가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상하원 특별 합동회의에서 개헌 표결에 앞서 연설하고 있다. /AFPBBNews=뉴스1
프랑스는 1975년부터 낙태를 허용하고 있어서 이번 개헌이 실제 프랑스 국민들에 미칠 변화는 없다. 그러나 상징적 의미는 상당하다. 프랑스 헌법은 1958년 제정된 이래 지금까지 20번 이상 개정됐으나 2008년이 마지막이다. 16년 만의 개헌이다. 새 개정안은 오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파리 방돔광장에서 열리는 공개행사에서 헌법에 공식적으로 새겨질 예정이다.

아탈 총리는 표결에 앞서 900여명의 의원들을 향해 "우리는 여성에게 도덕적 빚을 지고 있다"며 1975년 프랑스에서 낙태를 비범죄화하는 법안을 지지한 전 보건부 장관이자 저명한 페미니스트인 시몬 베일에게 공개적으로 경의를 표했다. 아탈은 "우리는 역사를 바꿀 기회가 있다. 시몬 베일을 자랑스럽게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들의 낙태권 지지율은 80%를 넘는다. 합동 의회 회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프랑스 전역에선 축하 행사가 열렸다. 가족계획운동의 리더인 사라 듀로셰는 이날 투표가 "페미니스트들의 승리이자 낙태 반대 운동가들의 패배"라고 말했다.


50년 전 판결 뒤집은 미국, 프랑스 "남일 아냐"


낙태권을 헌법에 명시한 프랑스의 움직임에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우경화가 동기가 강하게 작용했다. 2022년 미국 대법원은 그간 낙태를 보장해온 50년 전 판결(로 vs 웨이드)을 뒤집었고 이는 우경화 물결이 대륙을 건너 프랑스의 여권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불을 지폈다.

4일(현지시간) 프랑스 상·하원이 낙태 자유 보장을 담은 헌법 개헌안을 가결하자 파리 에펠탑에 '마이 보디 마이 초이스(my body my choice·내 몸이니 내가 선택한다)'는 슬로건에 불이 들어왔다. /AFPBBNews=뉴스1
실제 프랑스 정부는 법안 소개에서 "불행히도 이 사건은 고립된 게 아니다. 많은 국가, 심지어 유럽에서도 여성이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방해하려는 흐름이 있다"고 밝혔다. 프랑스와 미국 헌법 전문가인 마틸드 필립 게이는 AP통신에 "사람들이 언젠가는 극우 정부에 투표할 수 있고,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다른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의회 최초의 여성 의장인 야엘 브라운-피베도 합동회의 연설에서 "우리가 성취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데는 잠시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프랑스가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사회라며 자신이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으로서 회의를 주재하게 됐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프랑스 카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주교회의는 개정안에 반대했다. 바티칸의 생명 윤리기구인 교황청 생명학술원도 "보편적 인권의 시대에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있을 수 없다"며 프랑스 주교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냈다. 그러나 반대파의 의견은 프랑스의 여느 시위에 수십만 명이 몰리는 것과 달리 조용했다.


거꾸로 가는 미국, 트럼프 당선 땐 낙태 금지


프랑스에서 합법적 낙태를 위한 투쟁은 1971년 프랑스 여성 343명이 프랑스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가 비밀리에 불법 낙태를 해왔다며 법 개정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내놓으며 주목받았다. 4년 후 당시 여성 장관인 시몬 베일은 낙태를 비범죄화하는 한편 임신 중절 의료 서비스를 제한적으로 제공하는 임시 법안을 통과시켰다.

프랑스 의회가 헌법에 여성의 낙태 권리를 명시하는 법안을 승인하자 4일(현지시각) 파리의 트로카데로 광장에 모여 있던 낙태 권리 지지자들이 서로 부둥켜 안으며 환호하고 있다. 프랑스는 세계 최초로 낙태 권리를 헌법에 명시한 국가가 됐다. /AP=뉴시스
이날 특별입법회의에서 프랑스 의원들은 베일 전 장관과 함께 1972년 강간을 당한 후 불법 낙태를 한 16세 학생을 변호해 무죄를 이끌어낸 전 변호사 지젤 할리미에 경의를 표했다. 프랑스에서 낙태 합법화를 향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다.

미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오는 11월 재선에 도전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모든 아이는 신의 신성한 선물"이라며 낙태 금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로 vs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후 미국은 각 주마다 낙태권의 헌법 보장 여부가 엇갈리는 상황이다. 경구용 낙태약 판매가 민감한 사회 이슈로 부상해 보수 우위의 연방대법원이 이에 대한 검토에 들어가기도 했다.

로렌스 로시뇰 프랑스 상원의원은 이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언급하며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이 '저항하는 자들'에 맞서 국제적으로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질 바이든 미국 영부인 역시 최근 트럼프 후보를 두고 "여성들과 우리 가족들에게 위험한 인물이다. 그가 이기도록 방관할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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