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경제 발전' 빛 이룬 덩샤오핑…천안문 사태는 그림자[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채태병 기자 | 2024.02.19 05:30

편집자주 |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중국에 설치된 옥외광고판에 덩샤오핑 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사진이 게재돼 있는 모습. /AFPBBNews=뉴스1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실용주의 노선의 개방 정책으로 중국의 경제 발전을 이룩하게 한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론'이다.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은 과감한 개혁 정치로 국가 성장의 토대를 만들었고, 이후 40여년간 차근차근 성장한 중국은 미국과 함께 세계 경제를 이끄는 'G2'가 됐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덩샤오핑은 현재까지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중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에 꼽힐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뉴스1, 구글

덩샤오핑은 1904년 8월 22일 청나라 쓰촨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였던 1920년 프랑스에 넘어가 4년 동안 유학했다. 유럽에서 공부한 덩샤오핑은 1933년 공산당에 합류, 팔로군 정치위원으로 장강 도하 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도해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이후 그는 1952년 중국 국무원 부총리 자리를 시작으로, 1990년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 공산당의 요직을 두루 겸임했다. 이 과정에서 절대 권력자였던 마오쩌둥과 갈등을 빚어 세 차례나 실각하기도 했지만, 덩샤오핑은 오뚝이처럼 복직해 부도옹(不倒翁)이란 별명도 얻었다.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였던 덩샤오핑은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융합을 시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중국의 정치 이념인 사회주의 유지하되, 경제 정책은 철저하게 자본주의를 따랐다. 흑묘백묘론의 뜻처럼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실용주의 관점으로 정치와 경제를 바라본 셈이다.


덩샤오핑 사망 후 그의 뒤를 이은 장쩌민(江澤民)은 "덩샤오핑이 없었다면 중국 인민들은 문명화된 신생활을 못 누렸을 것"이라며 "또한 중국의 사회주의 현대화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덩샤오핑의 업적을 평가했다.

홍콩의 투소 밀랍인형관에 설치된 덩샤오핑 전 중국 주석의 밀랍인형 옆에서 한 모델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뉴시스

찬란하게 빛났던 덩샤오핑에게도 그림자는 있었다. 일각에선 그의 연안지역 중심 경제 정책으로 인해 중국 내 동서 불균형이 생겼고, 이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초래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 개혁에만 과도한 초점을 맞춘 탓에 내부 관료들의 부패를 조장했다는 지적도 있다.

아울러 덩샤오핑에게는 1989년 톈안먼(천안문) 사태라는 아킬레스건이 있다. 1989년 4~6월 중국 시민 및 대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 집결해 민주화 운동을 벌였다. 중국 정부는 군대와 전차를 투입해 민간인들을 유혈 진압했다.

중국 정부는 천안문 사태로 210여명의 시민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천안문 사태로 1만명에 가까운 중국 시민이 자국 군인에게 희생됐다고 추산됐다.

당시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은 리펑(李鵬) 국무원 총리에게 무력 진압 명령을 내리면서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리펑의 회고록에 쓰인 내용으로, 덩샤오핑이 자국민 학살을 지시했다는 간접적 근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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