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누구를 위해 사과를 하나

머니투데이 구민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 2024.02.16 02:05
구민교 교수(서울대 행정대학원)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필자는 한때 세상살이의 모든 관계를 '힘의 정치'로 봤다. 인간관계는 물론 국제관계의 본질은 상호 비대칭적 의존관계에서 파생되는 권력관계라는 주장은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아픈 기억도 있다. 학창 시절 소개팅 자리에서 마음에 든 상대에게 '컷오프' 당했다. 그 이유를 지금도 알 수는 없으나 "정치학은 어떤 공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모든 걸 권력관계로 본다. 부모-자식 간도 그렇고 남녀 간의 사랑도 권력관계다"라고 답한 것이 화근이었지 싶다.

사과 값이 금값인 요즘 대한민국 정치무대에서는 사과 주문이 한창이다. 장모, 명품백, 돈봉투, 연탄, 위성정당 등등 여야를 막론하고 상대에 대한 사과 요구가 넘쳐난다. 축구경기에서 졌다고 국가대표 선수들이 SNS에 단체 사과문을 올리는 게 이상하지 않은 나라다. 어쩌다 논란의 중심에 선 유명인들은 자필 사과문과 반성문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기도 한다. 당사자로서는 사과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다. 사과를 둘러싼 권력관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왜 우리 정치는 하필이면 '사과'에 집착할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사과가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는데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사과는 도덕의 매개변수다. 내가 상대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걸 극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이 사과를 받는 처지가 되는 거다. 여러 연구자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이르러 '도덕-권력-부'의 위계관계가 공고화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의 저자 오구라 기조에 따르면 '양반'은 도덕과 권력과 부를 모두 쟁취한 계층이었고 '사대부'는 도덕과 권력을, '선비'는 도덕만 차지한 집단이었다. '도덕'은 모든 엘리트집단의 필요조건이었던 것이다.

요즘 정치엘리트집단도 '도덕'을 중시한다. 하지만 '내로남불' 너머의 도덕의 진정한 가치를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정적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이들은 도덕의 편도, 부도덕의 편도 아니다. 그저 상대를 도덕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덕을 동원한다. 남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도덕의 잣대가 안고 있는 위선적 실체를 들키지 않고 권력의 바다를 헤쳐나갈 수 있는 한 상대의 도덕성이나 진정성 자체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맞춰 도덕의 소재를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


사과는 국가 간에도 중요한 외교적 수단이 된다.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에 대한 전후세대의 담론은 '사과의 정치'(politics of apology)라는 독자적 연구분야를 만들었다. 국가 정상이나 주요 정치인이 전하는 사과의 메시지는 그 국가의 정체성, 역사성, 주권 이슈와 결합해 그 국가가 갖는 소프트파워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필자만 '사과 피로감'(apology fatigue)을 느끼는 걸까.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나오는 대목이다. '조종(弔鐘)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알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 말라. 그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린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우리 자신에게 사과의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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