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전세사기 '건축왕' 징역 15년에…판사 "현행법 약해"

머니투데이 인천=김지은 기자 | 2024.02.07 17:36
전세사기 피해 사망자 A씨(30대)가 거주한 인천시 미추홀구 한 아파트 현관문. /사진=뉴스1

"저도 많은 고심과 고통 속에서 판결을 내렸는데요…"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일당에 대한 1심 선고가 이뤄지던 7일 오전 인천지법 법정. 판사는 190페이지 상당의 판결문을 쉴틈 없이 넘기며 입을 열었다. 피해자만 191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기 사건이다. 판사가 피고인 10명의 양형 사유와 핵심 쟁점을 읊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워낙 내용이 많다보니 재판부는 중간중간 목을 가다듬고 컵에 물을 따라 마실 정도였다.

재판부는 사기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60대 건축업자 남모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하고 범죄수익 115억5000여원 추징을 명령했다. 징역 15년은 사기죄로는 법정 최고형이다. 사기, 공인중개사법 위반 등의 혐의로 함께 기소된 공범 9명에게는 징역 4~13년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먹는 것, 입는 것과 더불어 집에서 평온하게 거주할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이자 천부인권"이라며 "특히 사회초년생이나 노인과 같은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범행해 동기나 수법이 매우 불량하다. 20∼30대 청년 4명이 전세사기 범행으로 숨졌지만 피고인은 국가가 피해 회복을 해야 한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씨 등은 2021년 3월부터 2022년 7월까지 인천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등 191채의 전세 보증금 148억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다. 남씨 일당의 전체 혐의 액수는 453억원이지만 이날 재판에는 먼저 기소된 148억원대 전세사기만 다뤄졌다. 추가 기소된 나머지 305억원과 관련된 재판은 별도로 진행 중이다.

1심 선고가 나오자 남씨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일부 피고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방청석에 있던 피해자들 70여명은 눈시울을 붉혔다. 두 손을 꽉 쥐며 안도했지만 동시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달라진 건 없다" 법정 최고형 나왔지만… 피해자들은 울분


7일 오전 인천지방법원 앞에서 미추홀구 전세사기 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김지은 기자

남씨는 2009년부터 공인중개사 등 다른 사람 명의를 빌려 토지를 매입하고 자신이 운영하는 종합건설업체를 통해 소규모 아파트, 빌라 등을 직접 건축했다. 부동산 개발 관련 대출금으로 건축 비용을 충당하고 임차인 전세보증금으로 사업비용을 지불했다.


남씨는 2700여채 주택을 보유한 '건축왕'이 됐지만 동시에 대출금과 전세보증금으로 이자, 보증금, 직원 급여를 대는 '돌려막기 주범'이 됐다. 대출 이자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자 일당은 임차인들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했다. 수백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지난해 2~5월에는 청년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 대책위원회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였다. 이들은 "판사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피고인에 대한 법정 최고형이 고작 15년"이라며 "지난달 바지임대인 2명은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8개월, 징역 1년에 2년 집행유예를 받았다. 주범과 공모자들에게 대한 강력한 엄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날 선고 과정에서 사기죄의 법정 최고형 형량을 높이는 관련법 개정안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판사는 "사기죄 법정형은 최대 15년인데 현행법은 인간 생존의 기본 조건인 주거의 안정을 파괴하고 사회 신뢰를 무너뜨리는 악질적인 사기 범죄를 예방하는 데 부족하다"며 "집단적 사기 범죄에 대한 적절한 구성요소와 처벌 규정을 마련해줄 것을 제안한다"고 했다.

이외에도 대책위는 범죄단체조직죄 확대 적용,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통과 등을 당부했다. 현재 남씨 일당 35명 중 18명이 범죄단체조직죄 혐의가 적용됐다. 유죄가 인정되면 범죄수익 몰수·추징이 가능해진다. 특별법 개정안은 피해자들의 보증금을 먼저 구제한 뒤 후 회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한편 이날 판사는 이례적으로 피해자들이 제출한 엄벌 탄원서를 낭독하기도 했다.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하는 사회초년생은 미래가 안보입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 나이 60인데 돈을 찾지 못하면 저 역시 먼저 떠난 사람들을 따라갈 수 밖에 없습니다." 방청석에는 여기저기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남씨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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