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이불비 정서의 귀환…"공백의 박자조차 서사의 구성"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에디터 | 2024.02.02 05:56

[김고금평의 열화일기] 9집 음반 낸 권진원 인터뷰…낮고 굵은, 그러나 따뜻한 선율의 향연

9집 앨범 낸 여성 싱어송라이터 권진원(오른쪽). /사진제공=권진원

가끔 느린 보폭으로 걸을 때 눈에 담기는 것들은 얼마나 새롭고 신비로울까. 가끔 한 박자 느린 듯한 리듬에 기대어 듣는 따뜻하게 읊조리는 멜로디는 또 얼마나 아름다우면서 반짝일까.

잊었던, 아니 잃어버렸던 감성의 편린들이 오랜만에 온몸을 타고 내려왔다. 여성 싱어송라이터 권진원이 최근 낸 9번째 정규 음반 'KWON JIN WON WITH ROB VAN BAVEL' 얘기다.

그의 노래들은 첫 음과 마주하는 순간부터 듣는 이의 숨을 제어한다. "당신은 이제 괜찮나요?"라고 묻는 듯 조심스럽게 위로하는 피아노에 이미 마음을 뺐겼는데, 낮고 굵은 그러나 사연 있는 깊은 호흡으로 내뱉는 가창까지 포개지자 심장마저 요동쳤다.

오로지 보컬과 피아노만으로 구성한 단출한 음(音)의 합(合)은 어떤 오케스트라보다 장중하고 어떤 록보다 강렬하다. 빈틈을 좀체 허락하지 않는 이들의 협연은 쉬어가는 공백의 박자마저 서사의 중요한 구성으로 쓰며 듣는 이에게 오로지 이 음에 집중하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그렇게 들으셨다면, 제 계획이 아주 잘 통했던 게 아닐까요? 하하. 몇 년 전부터 피아노와 노래만으로 구성한 음반을 만들 계획을 했는데, 저와 호흡이 맞는 아티스트를 적시에 잘 찾은 것 같아요."

앨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권진원은 자신의 음악을 속속 이해해 준 그를 'WITH'(함께)라는 앨범 명으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기자가 권진원의 첫 음에 마음을 뺐겼듯, 권진원도 바벨(Bavel)이 낸 연주 음반의 첫 음에 빠져 '구애'를 시작했다.

"바벨씨가 가끔 한국에 와서 공연도 하고 그래서 시간이 되면 음반 작업을 같이 하자고 부탁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맞아서 제가 네덜란드로 무작정 달려갔죠."

9집 작업을 위해 권진원(왼쪽)이 재즈피아니스트 롭 반 바벨의 고향인 네덜란드로 날아가 '라이브하듯' 수록곡 9개를 녹음했다. /사진제공=권진원

서로의 음악에 팬이 된 두 사람은 이렇다 할 설명도 필요 없이 호흡이 착착 맞았다. 스튜디오 라이브로 녹음된 이 음반에는 모두 9곡이 실렸는데, 권진원의 말대로 "라이브 하듯 한 번에" 녹음을 끝냈다. 이렇게 녹음된 곡들에서 권진원의 목소리는 '날 것' 그대로의 깊은 감성이 온전히 살아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노이만 마이크를 제가 쓰겠다고 하니, 엔지니어가 너무 고가이고 섬세하니, '육성에 자신 있는 사람만 불러야 한다'고 조언하더라고요. 바벨과 저는 한눈에 이 마이크를 사용해야 한다는 걸 알아채고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죠. 스튜디오가 엄청 커서 저는 위층, 바벨은 아래층에서 서로 바라보며 녹음했어요. 서로가 첫 음을 교환하는 순간, 앞으로 어떤 연결과 흐름으로 작업해야 하는지 대화가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요."


뛰어난 기교와 충만한 감성으로 유명세가 남다른 재즈 피아니스트 바벨은 '절제'와 '해석'이라는 두 가지 무기로 여성 보컬리스트가 쌓아 온 인생의 무게를 이해하고 체화했다. 신곡 '그 장소에 갔던 것도'는 완전히 다가가지 못했던 청년의 사랑을 표현했는데, 권진원이 약간의 체념과 후회, 그리움으로 그 감성을 전할 때 바벨은 그 청년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사실, 내 마음은 이랬어"라고 격하지 않는 절제의 감정으로 그녀와 동행한다.

'해비 버스데이 투 유'에서 바벨은 원곡의 재미있는 재즈 리듬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녹여 다른 해석으로 듣는 청취의 기쁨을 안긴다.

9집 음반 낸 어성 싱어송라이터 권진원. /사진제공=권진원

"'그 장소에…'에서 바벨의 간주를 듣는데, 사랑의 아픔과 닿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모두 들어가 있어서 놀랐어요. 연주자들은 대개 곡(선율)에 초점을 맞춰 연주하기 일쑤인데, 바벨은 영어로 번역된 가사를 여러 번 읽고 '이 메시지가 말하는 바'에 집중하더라고요. 그 사연이 마음에 이해되고 와 닿아야 비로소 연주할 수 있다니, 너무 새롭게 신기하고 아름다운 체험이었어요."

수록곡 9개는 신곡 4개(난 그대를 생각해/가을비/그 장소에 갔던 것도/너는 내 안에서 반짝인다), 2017년부터 싱글로 발표한 곡 3개(사월, 꽃은 피는데/나란히 걸어 갑니다/봄이 될거야), 그리고 바벨이 연주를 원했던 '해비 버스데이 투 유'와 권진원이 피아노로 재해석하기 원했던 '푸른 강물 위의 지하철'이다.

어느 곡도 허투루 듣기 어렵고 어느 곡도 얕은 감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다. 권진원이 지금까지 만든 100여곡 중 단조는 겨우 9곡일 뿐인데도, 사무치는 그리움이나 드러내지 않아 더 가슴에 남는 슬픔이나 덤덤하게 읊조리는 느린 쓸쓸함은 모두 '장조의 역설'로 인식될 법하다. 그런 권진원의 특징과 스타일을 금세 이해한 바벨이 비슷한 공감대로 빠져들면서 수록곡들은 물을 머금은 스펀지처럼 가슴 아린 무게감을 뽐낸다.

"어릴 때 소리들은 풋풋하고 익지 않았는데, 지금은 더 낮고 깊어져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어요. 그런 변화들이 전 좋아요. '너는 내 안에서'는 1분 30초 정도의 길이여서 원래 오프닝 곡처럼 쓰여야 하지만, 이번 음반에서 마지막 곡으로 배치했죠. 장조를 단조처럼 느끼게 하는 감정의 전이 현상도 그렇고요. 저는 그런 창작적(?) 발상이나 변화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가 무엇을 얘기하든, 이 음반을 접하는 대중의 태도는 대부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곡은 마침표를 어느새 찍고 있는데, 듣는 이는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리플레이 버튼을 속절없이 누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권진원의 9집 음반 표지 사진. /사진제공=유니버설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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