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배터리는 정부가 지정한 '국가핵심기술'이다. 검찰 등 수사당국은 기술유출 범죄에 한해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하겠다는 내규를 마련했지만 매번 법원 문턱에서 고배를 마셨다. 기술유출이 관련 산업과 국가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듯한 사법부의 판단에 수사의 난도는 그만큼 높아진다고 수사기관들은 호소하고 있다. 자칫 기술유출 사범들에게 '걸려도 큰 부담없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지난해 해외 기술유출 송치 건은 죄종별로는 국가핵심기술 2건을 포함한 산업기술보호법 6건(27.3%), 부정경쟁방지법 16건(72.7%)이었다. 피해기술은 디스플레이 9건, 반도체·기계 3건, 조선·로봇 1건, 기타 5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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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경 공조 기술유출 사범 구속영장 청구…번번이 "기각"━
'구속 없는 기술유출 범죄' 기조는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삼성SDI와 SK온 배터리 기술 유출 장본인들에 대해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좌절돼 결국 경찰은 이들을 불구속 송치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안보수사대는 지난 11일 A씨 등 삼성SDI·SK온 전·현직 임직원 5명과 한국법인 에스볼트(Svolt·펑차오에너지)코리아, 에스볼트 중국 본사, 모기업 만리장성자동차(장성기차) 등 법인 3곳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불구속 송치했다.(관련 기사☞[단독]"연봉 2배 줄게, 근무지는 한국"…'K배터리' 기술 빼간 中의 수법)
에스볼트 중국 본사는 국내 지사인 에스볼트코리아를 설립하고 2020년 6월 서울 성북구 고려대 산학관에 연구소 겸 사무실을 차려 주요 전기차에 들어가는 삼성SDI·SK온 배터리 관련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에스볼트의 모기업인 장성기차가 조직적으로 기술 탈취 관련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고 함께 검찰에 넘겼다.
이 사건으로 송치된 A씨는 삼성SDI에서 2009년 임원으로 승진한 인물로 배터리셀 핵심 기술 연구개발을 담당했다. 기술유출에 가담한 이들 일당은 2018년 회사 재직 도중 자신의 스마트폰 등으로 전기차 도면, 배터리셀 도면 등을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다가 에스볼트코리아 이직 이후 이 자료를 에스볼트 측에 제공했다. 이들의 연구·업무 경력 덕분에 기술유출 과정 자체도 순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의 신청에 따라 검찰이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피의자들은 모두 구속을 면했다. 중국에 위치한 법인이 기술유출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데도 법원은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반도체 기술을 유출한 혐의를 받는 전직 삼성전자 수석연구원 B씨의 구속영장도 지난 16일 기각됐다. 법원은 영장을 기각하면서 피의자가 별다른 범죄 전력이 없고 주거가 일정하며 수사기관의 수사·소환에 성실히 응해왔다는 점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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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확보 실패→불완전한 수사→낮은 형량 ━
배터리 기술유출 피의자와 삼성전자 반도체 기술유출 피의자 모두 굴지의 국내 로펌 소속 변호사를 선임해 방어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수사기관은 국가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임에도 범죄의 중대성보다는 '증거인멸 및 도주 가능성'이라는 형식적인 논리를 내세우는 법원의 벽을 뚫지 못한 것이다.
과거 기술유출 사건이 대체로 국내 기업간의 문제였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해외기업이 연루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그만큼 전체 범죄의 실체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 구속 여부는 형사 재판의 속도나 종국적인 형량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수도권의 한 부장검사는 "(기술유출)사범이 해외로 도피해버리면 압수수색 등 강제처분이 불가능해져 자료 수집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불구속으로 기소가 되면 피의자가 진술도 제대로 안하고 재판 지연은 물론 형량도 낮게 나온다"며 "실체 관계에 맞게 재판이 진행되고 양형이 되려면 구속영장이 발부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 현직 검찰 간부는 "기술유출 범죄 공범 관계에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증거 인멸 우려도 크다는 특성이 있다"며 법원이 최근 양형위원회를 계기로 변화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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