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피터 틸이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분명치 않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미디어 친화적이지 않다. 그러나 페이팔과 팔란티어의 공동 창업자이자, 테크노 리버테리어니즘의 화신이며, 좌파들의 눈에 도깨비처럼 보이는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자택과 사무실에서 나와 여러 차례 인터뷰를 갖기로 했다. 그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개방적이었고, 할 말이 많았다.
그런데 이 대화를 이끌어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틸은 어떤 공약을 하려 했고 내가 그것을 기사에 실어주기를 원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말을 주워 담지 못하게 못을 박아두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큰 소리로 해야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음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그 어떤 정치인에게도 기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는 트럼프의 진노를 산 바 있다. 틸은 한동안 트럼프의 전화를 피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지난 4월 말 전직 대통령은 틸을 전화로 불러내고야 말았다. 트럼프는 지난해 상원 의원 선거에서 본인이 틸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블레이크 매스터즈와 JD 밴스를 지지해 주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틸은 그들 각각에 1000만 달러 이상을 주었다. 이제 트럼프는 틸이 본인에게도 마찬가지로 두둑하게 챙겨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틸은 거절에 대한 트럼프의 반응을 이렇게 기억했다. "트럼프는 그런 말을 듣게 돼 매우, 매우 슬프다고 하더군요. 제게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통화가 끝났습니다."
몇 달 후 틸은 트럼프가 매스터즈에게 전화를 걸어 상원 출마를 또 한 번 만류하면서 틸을 "빌어먹을 쓰레기"라고 불렀다는 뒷말을 전해 듣게 됐다.
틸은 이 기사가 나감으로써 "2024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정치인들에게 한 푼도 주지 않도록 스스로를 묶어버리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생각을 바꿀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까요. 하지만 기자님과 대화하고 나면 제가 생각을 바꾸기가 어려워지겠죠. 제 남편은 제가 정치인들에게 더는 돈을 주지 않았으면 하고, 남편 생각이 맞아요. 그들은 제게 미칠 듯이 졸라댈 게 뻔하죠. 그리고 이렇게 기자님과 이야기를 함으로써 저는 2024년 대선 사이클에서 발을 빼게 되는 겁니다."
틸이 미국 정가의 생태계에서 가지고 있는 독특한 역할을 놓고 볼 때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틸은 기술 전도사 중에서도 최고의 테크 광이며, 실리콘 밸리 정신을 순수하게 증류해 놓은 인물이다. 그러다 보니 그는 점점 목소리를 키우고 늘려가는 테크 업계 창업자들의 사고방식을 구현하는 인물이 돼 가고 있는 중이다.
왜 틸은 정치인들과의 관계를 끊고 싶어 할까? 개별적으로 놓고 볼 때 별 볼일 없는 존재일 뿐인 정치인들이, 피터 틸 같은 사람이 기대할법한 문명 차원의 변화를 가져오기에 부적합하기 때문이 아니다. 피터 틸의 실망감은 보다 깊은 곳까지 뻗어 있다. 정치인들은 틸이 기업가로서의 이력을 모두 바쳐온 세계관과 비전을 구현하는데 실패했고, 그 점에서 틸은 다음 선거에서 누가 이기고 지건 아무 상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지만, 피터 틸은 민주주의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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