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 흉부외과 택한 父子에 남은 빛바랜 훈장

머니투데이 정심교 기자 | 2024.01.08 05:30

편집자주 |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내 아들까지는 나처럼 흉부외과 의사가 됐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나부터 다른 과를 선택할 겁니다."

한 흉부외과 원로 의사가 기자에게 털어놓은 속내다. 워라밸을 포기하더라도 '사명감' 하나로 흉부외과 의사가 됐다는 그는 아들에게도 흉부외과의 길을 권유했다. 하지만 흉부외과가 기피과 중의 기피과가 된 지금, 그에게 흉부외과는 '빛바랜 훈장'으로 남아있다.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통상 흉부외과·소아청소년과·응급의학과·산부인과 등 기피과를 지칭함)를 살리자는 데는 정부와 의사들의 이견이 없다. 하지만 정부가 최근 대한의사협회와 의대 증원 문제를 놓고 네 차례나 '결실 없는 대화'만 주고받는 사이, 향후 16년간 필수의료 결손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이 예고된다. 미래 기피과 의사를 확보하려 고군분투하는 동안 현재의 기피과 의사들이 한 줌의 모래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이미 '오픈런'이 일상화한 소아청소년과의 경우 자녀가 아플 때 갈 수 있는 병·의원을 찾는 것부터 일이다. 최근 5년여간(2018~2023년 5월) 폐업한 소아청소년과 의원은 총 580곳으로, 개업한 의원 564곳보다 많았다. 그마저도 현직 소아과 전문의마저 이탈 조짐을 보인다. 대한레이저피부모발학회가 지난달 3일 마련한 학술대회엔 피부·미용·성형·탈모·비만 치료법을 배우려는 소아과 전문의 250여 명이 찾아왔을 정도다.

흉부외과도 전문의도 이탈 분위기다. 이미 흉부외과 전문의의 60%가 대학병원 근무를 포기하고 개업의 길로 뛰어들고 있다. 이들이 개원하면 감기·다한증·하지정맥류 같은 비교적 가벼운 질환을 보는데, 이는 생사를 가르는 심장··폐암·대동맥 수술을 포기한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의료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의대 정원을 늘리기로 했지만, 문제는 2025학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늘린다 해도 이들이 전문의가 되기까지는 짧아도 11년, 보통 12~15년 소요된다는 점이다. 내년부터 최장 15년을 기다린다고 치면 올해까지 포함, 16년간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야 하는 셈이다.

당장의 기피과 인력난을 때울 현실적인 묘안이 있을까. 정부가 지난해 10월 내놓은 '필수의료혁신 전략'에 따르면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 내놓은 주요 대안은 '의대 정원 확대'와 '수가 인상'이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필수의료'인지는 제시되지 않았다. 한 의료계 원로는 "인기과인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도 필수의료라 주장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라고 쓴소리를 내뱉었다. 기피과 중에서도 심각도에 따라 지원책을 핀셋 단위로 세밀하게 나눠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산부인과 중에서도 부인과보다는 '산과'가 심각한 점, 흉부외과도 일반 흉부보다 성인 심장의 대동맥 질환, 소아 심장의 소아심장외과 분야의 의사 인력난이 심각하다는 게 지론이다.

'필수의료'라는 두루뭉술한 말 대신 '기피 필수의료', '지원 기피 필수의료'라는 식으로 용어부터 구체화해야 핀셋 지원이 가능하지 않을까. 향후 16년간 생사를 오갈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기피 필수의료'를 살리는 핀셋 지원책을 시급히 제시·실현할 때다.
정심교 머니투데이 바이오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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