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한 명만 바라보는 '팬덤', 정치인 '몰락' 부추긴다"

머니투데이 차현아 기자 | 2023.12.29 14:14

[the300]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7년 보좌했던 기록을 담은 '몰락의 시간' 저자 문상철씨 인터뷰

문상철 전 안희정 충남지사 수행비서./ 사진=차현아 기자

"안희정의 몰락을 개인 '안희정'의 몰락으로만 봐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7년 간 수행해온 문상철씨는 그를 지근 거리에서 바라봤던 소회를 담은 책 '몰락의 시간'을 최근 펴낸 이유를 이 같이 말했다. 안 전 지사의 '미투(Me too)' 사건은 당시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한 안 전 지사는 미투 사건을 계기로 하루 아침에 '가해자 안희정'으로 추락했다. 문씨는 안 전 지사에게 성폭력을 당한 김지은씨 편에 서서 증언했던 '내부 고발자'다.

문씨는 '내부고발자'가 됐다는 이유로 정치권에서 축출되다시피 떠났다. 이 책 출간을 계기로 3년 반 동안 일하던 회사를 또 떠나게 됐다. 회사에서 책 출간으로 이목이 쏠리는 것을 불편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문씨는 지난 20일 머니투데이 더300(the300)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도 당시 안 전 지사와의 일은 외면하고 싶은 기억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당시 안희정과 어떤 세상을 꿈꿨는지, 왜 우리는 몰락할 수 밖에 없었는지 기록하고 싶었다"며 "5년 전의 일이지만 '안희정'이 아닌 다른 정치인의 이름으로 대체해도 무방할만큼 정치인의 몰락을 이끄는 구조적 부조리는 여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음은 문씨와의 일문일답.

문상철 전 안희정 충남지사 수행비서./사진=차현아 기자

-2020년 5월 정치권을 떠난 후 약 3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냈는데,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외면하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글로 남긴다는 건 개인적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계속 미루고 미루다 이제 책을 내게 됐다. 제가 당시 겪었던 일은 정치권의 구조적인 문제와도 맞닿아있는 문제이므로 혼자 삭히고 끝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개인적 기억이 아닌 공공재로서 기록을 남기고 내용에 대해 토론해보고 싶었다.

-안 전 지사와는 어떤 인연인가
▶2011년 충남도청에 메시지·여론조사 담당 직원으로 시작했다. 수행비서로서 도지사가 참석하는 모든 공식 회의를 기록하는 일을 하며 안 전 지사의 신뢰를 얻었고 각계 전문가들을 강사로 초빙해 사회 각 분야 정책과 미래비전을 위한 공부모임을 만들어 안 전 지사의 차기 대통령으로서의 준비를 돕기도 했다. 2017년 민주당 대선 당시 안 전 지사 수행팀장을 맡았다.

-책에는 직접 만든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 행동 메뉴얼이 실려있다. 수행비서에게 감옥에 대신 갈 정도의 무조건적 로열티(충성심)를 요구하거나 커피에 얼마의 시럽을 넣어야 하는지가 적혀있고, 공관 도착 5분 전 공관 경비 근무자에게 연락하고 근무자가 정자세 경례로 영접하도록 한다는 등의 내용까지 담겼다. 왜 매뉴얼을 만들었는지, 당시 매뉴얼을 만들면서 안 전 지사가 과한 의전을 요구한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당시 안 전 지사를 따르고 헌신적으로 그를 도왔던 건 안 전 지사가 가진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철학을 가진 정치인이 대통령이 돼야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수행비서로서 안 전 지사를 도우면 대한민국에 공헌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누가 수행비서가 되더라도 같은 의전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뉴얼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안 전 지사도 과도한 의전에 익숙해졌고 특히 유력 대선후보로 떠오르면서부터는 충언하는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행비서들도 안 전 지사에게는 불편한 얘기를 하지 않게 됐다.

-신뢰하던 안 전 지사를 처음으로 의심의 눈으로 보게 된 계기가 안 전 지사의 '여성 편력' 때문이었다고 적었는데
▶맞다. 물론 누구나 개인적인 문제는 있을 수 있지만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대선 경선 기간에 기존에 잡혀있던 공적인 일정을 취소하고 갑자기 다른 일정을 잡거나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모습들을 바로 옆에서 보면서 조금씩 '내가 맞는 사람을 지지하고 있는건가'라고 질문을 던지게 됐다. 의전 문제도 마찬가지다. 조직 밖에서 내부의 문제를 들여다봤다면 과도하다거나 이상하다는 걸 느꼈겠지만 안에 있다보니 문제를 인식하지는 못했다.

-유력 잠룡으로 대권을 준비해온 안 지사가 본격적인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시점은 2017년 대선이었던 것 같다. 당초 예정보다 빨리 대선이 치러지면서 출마 준비도 서두르게 된 것인데, 책에는 안 전 지사가 갑자기 몰려든 팬덤이나 재계 등의 로비에 혼란스러워했고 개인적인 철학까지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적었다. 만약 갑작스럽게 대선이 치러지지 않거나 좀 더 차분하게 대선주자로서 스스로 가다듬을 시간이 주어졌다면 안 전 지사의 정치행보는 달랐을까
▶당시 정치 상황의 영향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후 대권 시계가 빠르게 돌아갔고 민주당 경선에서만 이기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정치 지형이 만들어졌던 때다. 유력 경선후보였던 안 전 지사에게 세간의 기대가 쏠렸고 캠프 내에서는 충분히 경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 급박하게 바뀐 정치 지형 속에서 안 전 지사가 그 속도를 스스로 이겨내지 못했던 것 같다. 또한 그 전부터 관계에만 집중했던 '의전 카르텔'이나 캠프 조직 내 운동권 인사 중심 가부장적인 질서 등 이미 몰락의 씨앗들은 존재했다. 역사엔 가정이 없기 때문에 예단할 순 없지만, 잠재된 문제들이 정치 환경과 구조적 문제와 맞물리면서 몰락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안 전 지사의 몰락을 이끈 요인 중 하나로 팬덤정치를 꼽았다. 팬덤정치는 왜 문제가 있다고 보나
▶안 전 지사는 민주당의 대선 경선 과정에서 상대 후보 팬들로부터 '문자폭탄'을 받고 크게 위축됐는데 그게 자신을 향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지지와 환호를 보내주는 팬들에게 의지하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안 전 지사 팬의 경우 순수하게 팬심으로만 모인 사람들만 있지는 않았다. 팬덤의 대표자 자격으로 정치인을 만나고 그것을 자신의 비즈니스에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경선이 본격화되면서 안 전 지사와의 친분을 남용하는 이들이 난무했고 이들은 팬덤을 등에 업고 캠프 메시지와 정책까지 관여하기 시작했다. 국민을 대변하는 선출직 공직자라면 그 공직자 자리에 있으면서 팬들만 바라보고 팬들만 대변하는 정치인이 될지, 공적인 위치에 맞게 대다수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지 정치인 스스로 기준을 가져야 한다. 그 기준이 없다면 정치인의 정치적 판단은 언제나 팬덤에 휘둘릴 수 밖에 없다. 지금도 한 사람의 정치인을 몰락시키는, 팬덤정치와 같은 민주주의를 우습게 보는 세태들이 반복되고 있다.

- '내부고발자'가 됐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나. 정치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도구이기 때문에 정치권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여전히 그 생각은 유효한가
▶만약 내부고발자가 될지 갈림길에 다시 서게 된다면 한 5초 정도는 고민할 것 같다. 하지만 선택 자체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적어도 세상은 진보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부 문제를 고발한 사람의 삶도 '해피앤딩'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정치에 대한 효능감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세상의 변화를 크게 이끌어낼 수 있는 도구로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구축하는데 정치가 잘 쓰인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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