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한국에서 한국을 찾다

머니투데이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 2023.12.15 02:05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1968년 노래 'America'는 가난한 청춘남녀가 희망을 찾아 미시간주 새기노에서 뉴욕까지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새기노에서부터 나흘간 히치하이킹을 해 피츠버그에 도착한 이들은 마침내 뉴저지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탑승한다. '폴'이 '캐시'에게 말한다. "미시간은 내게 이제 꿈만 같다"고. 고향에서 산 날들이 한낱 춘몽으로 여겨질 만큼 '뉴욕'으로 상징되는 '아메리칸 드림'은 화려하고 가슴 벅차다. "We walked off to look for America." 그렇게 그들은 미국을 찾아 떠났다.

심야버스에서 연인은 쿠키를 나눠 먹고 마지막 한 개비 남은 담배를 아껴 피우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달은 광활한 들판 위로 떠오르고 쪽잠에서 깬 폴이 눈을 비비며 창밖의 빛 무더기를 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달빛보다 더 환한 빛이 천지사방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다. 뉴저지 톨게이트로 들어서려는 수천수만의 자동차를 보자 폴은 기가 죽어 "나는 길을 잃었어"라고 중얼거린다. 캐시가 잠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캐시에게 "공허하고 아픈데 이유를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창밖의 수많은 차, 차들보다 더 많은 사람이 전부 미국을 찾으러 왔다. 뉴욕에만 가면 성공할 줄 알았던 새기노 뜨내기는 자본도시의 무한경쟁과 비정한 각자도생을 겪기도 전에 이미 절망하며 고개를 떨군다.

헤겔은 보편적인 것이 개인과 관계 맺는 구체적 방식을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명명했다. 국가나 사회 등 보편적 개념이 미국이나 한국사회 같은 특수성으로 전환돼 '나'에게 받아들여지는 저마다의 맥락을 의미하지만 보다 깊은 층위에서는 개인의 특수성이 한 국가, 사회, 문화의 특수성 안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을 겪게 될 때 평범함, 즉 보편성으로 전락하는 실패의 원리를 말하기도 한다.

1960년대 미국은 엄청난 경제호황을 누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 대유럽 무역과 군수 사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후 뮤추얼펀드(Mutual Fund)의 투자 활성화로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일으킨 것이다. 누구나 쉽게 중산층에 진입할 수 있었으며 모든 산업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노래 속 폴과 캐시가 성공을 좇아 뉴욕으로 향했듯 지방 출신 청년들은 기회의 땅인 대도시로 모여들었다. 그곳엔 찬란한 미국이 있기에. 그러나 그 미국은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폴과 캐시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임에도 미국을 찾아 떠났고 결국 미국을 찾지 못했다. 새기노에서 똑똑한 자신들이 특별한 줄 알았지만 재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미국에 거부당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청년세대도 길을 잃었다. 공허하고 아프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정수라의 '아 대한민국')라는 노래 속 한국은 머나먼 신기루일 뿐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가 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 한국은 청년들에게는 생경한 다른 나라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임에도 한국을 찾을 수 없고 한국을 가질 수 없다.

특수청소업체 직원에 따르면 고독사 현장의 시신이 대부분 2030 사회초년생과 취업준비생이라고 한다. 발버둥 쳐도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없기에, 노력해서 스펙을 쌓아도 미래를 꿈꿀 수가 없기에 스스로 생을 저버린 것이다. '시체 치워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죽은 한 청년은 수개월 만에 수습됐는데 부패한 변사자의 경우 '일반쓰레기'로 분류돼 쓰레기봉투에 담겨 폐기된다고 한다. 그들이 살았던 한국은 어떤 한국일까. 그들의 한국과 우리의 한국은 같은 한국일까. 자신이 일반쓰레기로 버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은 분리수거에 철저한 나라일까.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데 한국이 낯설고 섬뜩하다. OECD 경제대국 한국, G20 선진국 한국은 누구의 한국일까. 그 한국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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