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끝을 대하는 자세

머니투데이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 2023.12.04 02:02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고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달이다. 연말 즈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화살 같은 시간의 냉정함에 탄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김없이 돌아오는 한 해의 끝은 다시 새로운 시작을 다짐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지기에 그렇게 우울해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태어나서 단 한 번 오직 정주행뿐인 게 인생이다. 나도 모르게 내던져진 이 연속의 항로 위에서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인연은 찾아올 때도 떠나갈 때도 예고가 없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건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이별들에 허우적대는 우리에게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해의 바뀜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위안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시간의 주기들 속에서 우리는 쌓았던 세월을 떠나 보내는 법을 배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시간에 관계한다. 연대기(chronicle)나 연표(chronology)의 어원이기도 한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시간, 즉 만물에 똑같이 적용되는 자연의 시간을 가리킨다. 이 크로노스는 자기 자식마저 삼켜버리는 매정한 신이다. 절대적인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늙어가고 결국 소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시간의 경험들도 존재한다. 지겨운 잔소리는 3분도 참기 어렵지만 친구들과 놀다 보면 3시간도 금방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갑자기 시간이 느려지는 순간이 있다. 순간의 강렬함을 드러내기 위해 슬로모션으로 시간을 클로즈업하는 것이다. 온 세상의 흐름이 멈추고 주인공들의 눈빛, 그들의 심장소리만 살아 있다. 반대로 의미 없는 시간들은 빠르게 움직이는 인파처럼 무심한 일상의 속도로 묘사된다. 달력이나 시계의 숫자들과 무관하게 실제 시간은 이렇게 주관적으로 경험되고 그에 따라 순간들은 기억되거나 잊힌다.

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이 바로 카이로스다.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기도 하다. 기계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붙잡는다면 결정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도, 소중한 순간의 기억을 새겨 담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카이로스도 시간은 시간이다. 개인에게 차별화한 기회로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절대 여유롭게 기다려주지는 않는다. 카이로스는 날개 달린 발에, 손에는 저울과 칼을 든 젊은 신으로 묘사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머리다. 앞머리는 풍성하지만 뒤쪽은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다. 자신의 가치를 채우고 준비된 자라면 날아갈 듯 빨리 달리는 이 신의 앞머리를 붙잡을 수 있겠지만 다가올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뒤쪽에서는 결코 그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항상 한발 늦게, 놓친 기회들과 매몰찬 끝을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에겐 야속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빠른 아킬레스라도 그보다 앞에서 출발해 쉬지 않고 이동하는 거북이는 결코 따라 잡지 못한다는 제논의 역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마치 크로노스처럼 모든 존재의 순서와 관계를 수학적인 좌표로만 이해한다면 그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거북이가 정말 아킬레스를 따돌릴 수 있다고 믿다니! 그런데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만나지 못한 게 아니라 진작에 스쳐지나가 버렸다면 어떠한가.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원래의 목표를 놓치기도 하지 않는가. 카이로스와의 엇갈림처럼 어긋난 기회들이 발생시키는 후회가 밀려올 것이다.


냉정하고도 무서운 시간의 교훈이다. 시계태엽같이 돌아가는 크로노스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면 카이로스의 순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영원한 상실이 아프다면 무심히 돌아가는 일상에서 위안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끝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눈을 맞추고 끌어안고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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