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은 "피랍된 선원들의 생존이나 건강 상태를 확인할 수 없어 절박하다. 협상이 해결될 여지가 없어 막막하다"며 "언론보도가 매우 조심스럽지만 생사 절벽에 서 있는 가족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국민과 국가에 도움을 호소하게 됐다"고 눈물 흘렸다.
'제미니호 피랍 사건'을 언론이 다룬 지 100일째 되던 2012년 12월1일, 장기 피랍된 싱가포르 선적 제미니호의 한국인 선원 네 사람이 1년7개월 만에 전원 석방됐다. 582일에 이르는 이 사건 피랍 기간은 현재까지도 국내 해적 피랍 사건 중 최장 기록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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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명 선원 석방했다…한국인 4명만 빼고━
제미니호 선박은 싱가포르 국적 선사 소유였다. 선사는 해적과 협상에 나섰다. 해적의 요구사항은 특이했다. '아덴만 여명 작전'에서 사망한 해적 8명의 몸값을 치러달라는 것. 이 작전은 제미니호 피랍 3개월 전, 대한민국 해군 청해부대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삼호 주얼리호를 구출하며 성공시킨 작전이다. 해적 쪽에서 8명 사망·5명 생포·4명 실종됐고 해군 측 피해 규모는 부상 3명에 그쳤다.
싱가포르 선사는 그해 11월 협상금을 주고 배와 선원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한국 선원들만 풀려나지 않았다. 한국 선원들은 내륙으로 재납치돼 인질로 잡혔다. 재협상에서 해적은 여전히 사망한 해적 8명과 생포된 해적 5명에 대한 포기 대가로 보상금을 요구했다. 선사 측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외교통상부는 테러 집단이나 해적 등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불개입 원칙을 따른다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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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된 엠바고…"500일 동안 진전 없었다"━
그러다 장기피랍 상황이 2012년 8월 언론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피랍 선원 가족들도 언론 대응에 나서기로 결심, 같은 해 10월8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견을 기점으로 협상에 진전이 나타났다. 피랍 선원이 속한 선박노조도 나서 긴밀하게 협조하며 구출 방안을 모색했다. 보도 이후 협상금 역시 낮춰진 것으로 전해졌다.
피랍 선원 가족들은 정부의 보도유예 지침을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가족들은 10월 기자회견에서 "언론 보도는 협상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정부와 선사 쪽)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언론에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500일 동안 아무런 변화도 진전도 없었다"고 했다.
중요한 인터뷰도 나왔다. '아덴만 여명 작전' 성공이 되레 해적들의 납치 동기를 심어줬다는 것. 한국 선원을 납치했다고 주장한 소말리아 해적은 당시 KBS '추적60분' 제작진과 인터뷰에서 "지난해 그 사건(아덴만 작전)이 일어난 후 한국인들을 찾고 있었다. 친구와 친척들이 한국 군인들의 공격에 의해 죽었다. 그래서 우리가 흥분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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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니호 피랍선원, 고국 땅 밟다━
4일 뒤인 12월5일 오전 4시22분 대한항공 KE960편으로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현장에서 간단한 인터뷰를 한 뒤 오전 7시30분 김해공항을 통해 부산에서 가족과 만났다.
고국 땅을 밟은 선원들은 "해적에게 잡혔을 때부터 풀려날 때까지 살해 협박이 계속됐다"며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가족의 얼굴을 실제로 보고 안아주고 싶다"며 "생활이 힘들었던 탓에 7~14㎏가량 몸무게들이 줄었다. 김치, 된장찌개, 삼겹살 등 모든 음식을 다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적이 제시한 금액은 알고 있지만 얼마가 어디에 지불됐는지 안 됐는지 여부는 전혀 모른다"며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경우에) 일을 처리하기 위해 모두가 힘쓰고 있다는 메시지가 당사자에게도 어떤 경로로든 전달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버틸 힘이 날 것 같다"고 밝혔다.
다만 정부는 보상 문제에 대해 피랍자 간 형평성 문제와 당시 현행법을 들어 모든 책임을 선사가 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건강검진 등 의료지원과 임금 문제는 국토해양부 고시와 선원법에 따라 선원송출회사인 선박 회사와 싱가포르 선사에서 보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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