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반쪽짜리' 연명의료계획서

머니투데이 박정렬 기자 | 2023.11.27 03:30

이달 초 할아버지 기일이었다. 2년 전, 90세가 다 돼 폐암을 진단받은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자식들 고생하는 게 당신 아픈 것보다 싫으셨던 게다. 수년 전에 이미 불필요한 생명 연장은 원치 않는다며 사전연명의료의향서(계획서)도 작성해두셨던 터였다.

하지만, 연명의료계획서는 당신 입장에선 '반쪽짜리'였다. 수개월 내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말기'는 대상이 아니고 곧 사망할 '임종 과정'에만 적용됐기 때문이다. 암이 진행돼 급성 폐렴으로 응급실에 실려 온 그날부터 두 달간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살았다'. 수액과 영양제가 혈관이 꽂혔고 산소를 공급하는 콧줄이 달렸다. 심장 박동과 혈중 산소량을 기록하는 센서도 몸에 덕지덕지 붙었다.

할아버지는 연신 그것들을 떼버리려고 했다. 호흡이 가빠 필담(筆談)으로 장례 절차를 적고 "편히 죽고 싶다"고 썼다. 하지만, 병원은 법적 책임 등을 이유로 환자를 마음대로 죽게 두지 못했다. 그것이 설령 개인의 의지라도, 그 의지를 드러낼 의식이 있는 한 연명의료는 계속돼야 했다.

가족들은 간병에 나섰다. 마지막을 배웅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먼저였다. 그러나 간병은 현실이었다. 한 달이 넘고, 두 달째 접어들자 가족들의 휴가는 거의 남지 않았다. 소모되는 체력도 문제였다. 폐렴을 이유로 절대 금식하는 탓에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갈증과 답답함을 호소했다. 10분마다 젖은 거즈로 입 안과 몸을 닦고 한없이 부채질해야 했다. 새벽이면 뇌가 지쳐 헛것이 보이는 섬망이 나타나 울며불며 팔다리를 꽉 붙잡았다. 30대인 기자조차 밤낮없는 간호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밝은 불빛, 기계음이 가득한 병실에 누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뜨거운 콧바람을 주입하며 물조차 먹지 못했던 그 시간은 과연 '존엄'했을까. 병상에서 "가을바람을 쐬고 싶다"던 할아버지는 볕 잘 들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선산에 잠드셨다.

지난해 국민권익위원회가 3008명에게 "말기 환자도 조건에 해당할 경우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78.21%가 동의, 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했다. 모르겠다는 16.95%, 동의하지 않는다는 4.81%였다.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된 지 5년 만에 200만 명 이상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것은 '존엄한 죽음'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대변한다. 좋은 죽음을 고민할 때 진정한 돌봄도 뒤따를 수 있다.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는 지금, 더 늦기 전에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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