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곁엔 의젓한 진돗개가 있었다. 털은 하얗고, 쫑긋한 귀와 등엔 밤색 빛이 돌고, 코는 분홍빛에 까맣고 총명한 눈이 반짝거렸다. 할아버지가 이야길 꺼냈다.
"내가 혹시나 죽고 나면 야 혼자 남겨지면 어떡해. 그러기 전에 가족 찾아줬으면 해서 왔어요."
나이는 7살, 이름은 행운이. 행복하게 잘 살라고 지어준 단순하고 뜻깊은 이름. "행운아, 행운아"하며 단둘이 지냈을 일곱 해의 시간. 그러니 몇십 번을 고민하고 발걸음을 돌리고 또 주저했을 말. 그런 게 노인의 표정에 다 있었다. 그러나 결심한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가, 좋아하기에 걱정돼 좋은 곳에 보내려 어필하던 말. 그게 무슨 말인지 아마 잘 몰랐을 행운이는 해맑게 내어준 간식을 냠냠 먹고 있었다. 이따금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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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수술 후 죽을 수 있단 생각…행운이를 보내주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속절없는 세월의 섭리는 정정한 노인도 무너지게 했다. 꽃이 만개하고 따스한 5월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때 일을 회상했다.
"갑자기 어지럽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그러더라고요. 금방 쓰러질 것 같아서 119 불러서 병원에 갔지요."
큰일날 뻔했다. 의사는 할아버지 심장이 약하다고 했다. 박동기를 심장에 다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사흘을 입원했다. 할아버지가 행운이와 떨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친한 이웃집 할머니에게 행운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잘 마치고 돌아왔다. 행운이는 오랜만에 본 할아버지를 보며 좋다고 겅중겅중 뛰었다.
2016년 12월 29일. 아내도, 자식도 없이 홀로 사는 외로움에 성남 모란시장에 갔던 날. 그날 처음 만난 하얀 꼬물이. 박스에 있던 5마리 중, 가장 활발하게 움직여 맘이 갔던 강아지. 추울까 싶어 잠바 속에 따스히 품고, 지하철을 타고 돌아와 가족이 됐던 개. 행운이.
매년 생일이면 닭까지 삶아주며 애지중지 키우던 행운이. 그와 헤어질 생각을 처음으로 하는 거였다.
"갑자기 몸이 이상해지니 쓰러져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이놈이 걱정이 되더라고요. 꼭 자식 같아가지고. 가만히 생각하니 안 되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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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인터뷰까지 한 날…밤새우고 "행운이 없인 안 되겠어요"━
"영리한 행운이가 눈치를 챘는지 평소보다 더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갈등으로 밤새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행운이가 없으면 마음의 병까지 생길 것 같습니다. 남은 인생 동안 같이 해야겠단 생각입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리 입양은 없던 일이 되었으나 염려가 남아 있긴 했다. 혹여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행운이는 어떡할지. 다른 사람에겐 마음을 안 여는 개라 더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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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도와준 설채현 수의사, 이규상 트레이너…그 언젠가를 위한 '행운이 훈련'━
계획은 이랬다. 할아버지와 행운이는 함께 잘 지낸다. 다만 할아버지 건강이 나빠질 것에 대비해, 행운이를 훈련하자는 것. 할아버지만 따르고 다른 이를 경계하는 터라, 이를 낮추고 다른 이와도 두루 잘 지내게 하는 것. 그럼 나중에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떠나셨을 때 입양 가기도 쉬울 것이므로. 훈련이 잘되면, 장 대표와 다른 이들이 틈틈이 산책을 하며 행운이의 사회성을 키워주기로 했다.
우린 나란히 앉아 머리를 맞대었다.
"저희가 목표로 해야하는 건 뭘까요?"(이규상 트레이너)
"행운이가 혼자 남았을 때 입양갈 기회를 늘리는 거라 생각했거든요. 성격이 무던해야지 임보든, 입양이든 잘 가잖아요. 행운이가 다른 사람 손을 전혀 안 타면, 보호소로 갈 수 있단 생각을 했어요."(장신재 대표)
관건은 이런 거였다. 예컨대 개들에게 두 가지 가치가 있다면, 더 높은 가치를 선택한다. 지금의 행운이에겐 절대적으로 할아버지다. 이 트레이너는 "할아버지와 떨어졌을 때도 나한테 좋은 일이 생긴단 걸 알아야 해요. 트레이닝으로 이걸 끌어올려서, 행운이가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낼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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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심 많은 행운이…간식 먹을 때도 뒷다리에 힘을 주었다━
할아버지 집 앞에 가서 연락드렸다. 행운이가 느끼는 첫인상이 중요하단다. 그러니 밖에서 만나는 게 좋다고 했다. 이 트레이너는 "우르르 들어가면 성향에 따라 경계할 수 있다"고 했다.
"어서오세요. 오시느라고 고생했지요."
할아버지와 행운이가 집에서 나왔다. 이 트레이너가 몸을 낮추고 행운이와 인사했다. 그는 "행운이가 지금 털을 세우고 경계를 많이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눈은 본다고, 괜찮은 거란다.
이윽고 집에 들어가기로 했을 때, 행운이가 마당에서 우릴 보며 맹렬히 짖기 시작했다.
"워워우엉웡웡, 워어어어웡웡웡, 웡웡웡웡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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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려서 눈이 감겨도…귀는 계속 쫑긋거리던 행운이━
"밥이 저기 있는 건 좋지 않아요. 저렇게 많으면 트레이닝도 잘 안 되고요. 뺏어갈 거라고, 지켜야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위치를 할아버지 방 안쪽에 두시는 게 나아요. 저런 친구들이 누가 오면 먹어요."
"그러게 말이야, 꼭 그러더라고요."(할아버지)
행운이가 할아버지를 정말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작은 몸짓에도 꼬릴 흔들고, 눈을 마주치고, 달려들어 뽀뽀를 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옆에 딱 붙어서, 할아버지를 지키려는 듯 꼼짝하지 않고 우리 쪽을 바라봤다(노려봤다). 이 트레이너에게 물었다.
"눈을 바라보고 불안하지 않게 둔감화를 계속 해줘야 해요. 지금은 편하게 안 있거든요. 편하다면 소파에 가거나 할텐데, 계속 지키잖아요."
돌아가며 간식을 줘보았다. 이 트레이너의 말대로, 간식을 찢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행운이가 다가와 맛있게 먹었다. 먹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며 가만히 앉기도 했다. "행운아, 손. 손"하며 애걸했지만 행운이는 손은 주지 않았다. 장 대표도 시도했으나 간식은 먹고, 손 주기는 실패했다. 이 트레이너가 눈을 맞추며 훈련할 땐 다시 '웡웡웡' 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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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 가서도 잘 따랐으면"…할아버지의 '걱정'━
"내가 감주를 잘해 먹거든요. 식혜. 주면 기가 차게 먹어요. 나 먹을 때마다 행운이 한 모금씩 얻어먹고."(할아버지)
"주면 좋아하는데 몸에 안 좋아요. 그래서 살쪘구나."(이 트레이너)
"안 좋아요? 안 좋은 것만 시키는구만 내가, 하하. 커피도 얼마나 잘 먹는지 몰라."(할아버지)
"안 돼요, 심장 콩닥콩닥 뛰어요."(이 트레이너)
"너 커피 먹으면 안 된대. 오늘부터 이제 안 준다."(할아버지)
"그냥 나하고 이렇게 살면 돼. 내가 건강할 때까지. 그 뒤로는…모르지 나도."
훈련이 끝나갈 무렵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뒤에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게 실은, 본심이었다.
"나이 먹어가지고 남한테 가면 이제 좀 어렵잖아요. 그러니까아, 여느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하면 가만히 있어야지. 근데 이놈은 가만히 안 있거든. 도망가든지 뿌리치든지. 그게 걱정이지 딴 건 없어요."
그리고 들었던 할아버지의 굴곡진 인생 이야기.
사업하다가 부도가 났단다. 그의 나이 60세가 넘었을 때라 다시 서기가 어려웠다. 자식은 늦게 낳았기에 아직 어렸다. 가족들에게 피해줄까 싶어 떨어져 살았단다.
할아버지는 능력 없어 잘 못 키워준 스스로를 자책했다. "내가 잘못했지. 나도 할 말이 없어. 부모 노릇 못했으니 안 찾는 거겠지. 그래도요. 전화 한 통이라도 해주면…참 뿌듯할텐데."
죽을 때 어떻게 처리해달란 유서까지 품고 산다던 할아버지였건만, 자식 얘길 할 때만큼은 온갖 서운함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때 행운이가 곁에 다가와 할아버지 곁에 가만히 기대었다. 따뜻했으리라. 그러자 다시 행운이 자랑이 시작됐다.
"자식보다 낫지요. 행운이가. 어느 날엔가 자다가 신음하고 그랬었어. 그러니까 벌떡 일어나서 와서 핥고 그러는 거야. 그런다고요. 그런 놈을 누구를 주겠어요."
할아버지가 혹여나 떠날, 그 만약을 대비하여 하는 이 훈련이, 실은 앞으로 전혀 쓸모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나는 어느 전래동화의 뻔한 결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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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운이는 매주 이규상 트레이너님과 함께 훈련하기로 했습니다. 사정이 어려운 할아버지를 위해, 또 둘의 행복을 위해, 이 모든 걸 무상으로 진행해주시는 그에게 진정 감사를 전합니다. 장신재 정글핌피 대표와 저도, 행운이가 다른 이에게도 맘을 잘 열 때까지 함께할게요. 훈련기는 <체헐리즘 뒷이야기>로 다시 전하겠습니다. 제 기자 페이지나 '남기자의 체헐리즘' 연재를 구독해주시면, 가장자리 작은 이야기에 힘을 보태주실 수 있어요. 그로 인해 무언가 바뀌도록 애쓰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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