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 리무진 맞고 튕긴 총알, 폐에 박혀… 대통령 기억 잊은 '아이언 맨'

머니투데이 정심교 기자 | 2023.10.15 08:00

[정심교의 내몸읽기] 권력자의 건강 이야기 ⑦레이건과 알츠하이머병

편집자주 | 무소불위의 독재자부터 영향력 있는 지도자까지 세계사의 주요 페이지를 장식한 이들은 세상을 평정한 '권력자들'이었다. 견고한 성(城)처럼 보인 그들의 권력은 다름 아닌 '질병' 앞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옛말처럼 제아무리 힘 있는 권력자도 건강을 잃으면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법. 근·현대사에서 권력을 쟁취한 이들이 권력을 내려놓기까지의 건강 이야기를 연속해서 탐독한다.

미국 제40대 대통령을 역임한 로널드 윌산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 1911~2004년).

"나는 이제 인생의 황혼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언제나 빛나는 아침을 맞이할 것이라 믿습니다."

미국 제40대 대통령을 역임한 로널드 윌슨 레이건(1911~2004년, 이하 레이건)이 1994년 알츠하이머병을 투병하는 사실을 국민에게 쓴 편지 속 글귀다. '위대한 소통가'로 명성을 쌓은 그가 사실상 국민에 마지막으로 남긴 공식 메시지다.

'잘생긴 배우 출신'으로 평가받는 레이건은 고운 외모와 달리, 그의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1911년 미국 일리노이 주 템피코 시에서 2남 중 막내로 태어난 그의 가정환경은 매우 가난했다. 아버지는 구두 외판원이자 알코올 중독자로 늘 돈이 없었다. 어머니는 술에 절어 잠에 취한 남편을 침실로 옮겨 놓기 바빴다. 미국인이 잘 먹지 않는 내장을 '개 먹이용'이라 둘러대며 정육점에서 공짜로 얻어와 먹는 게 일상이었을 정도다.

이처럼 불우한 환경에서도 레이건은 10대 청소년 시절부터 사회활동을 왕성하게 한다. 강가에서 안전요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고등학교 학생회장, 학교 연감 편집장, 수영부 주장, 미식축구팀 주전, 육상부 주전, 농구부 응원단 멤버를 한꺼번에 맡았다. 일리노이 유레카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미식축구팀 주전, 수영부 주전, 육상부 주전, 학생회장, 연극부 멤버, 농구부 응원단장 등을 도맡았다.

라디오에서 스포츠 아나운서로 근무한 레이건.
1937년 아이오와주 방위군 육군 예비역 이병으로 군인이 된 그는 같은 해 예비역 육군 기병 소위가 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 육군 항공대로 전속됐는데, 국방부 선전 영화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1945년 12월, 전역한 그의 최종 계급은 육군 대위로, 미합중국 공군 창설 후 공군 예비역 장교로 전환됐다. 유레카 대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오와주 지역방송국에서 라디오 아나운서로 근무하며 스포츠 방송을 중계했다. 그의 잘생긴 외모를 눈여겨본 워너 브라더스 사는 그를 배우로 발탁했고, 1937~1965년 그는 '킹스 로우(Kings Row)' 등 영화·드라마 총 83편에 출연했다.

레이건이 정치에 입문한 건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도전하면서다. 그는 △복지 혜택을 받는 백수를 다시 일하게 할 것 △반전운동의 중심지였던 버클리 대학교에서의 사태를 청소할 것 등 두 가지 공약을 내세웠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1967년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된 후 간접세를 높이고 주 정부 규모를 축소하며 복지를 개혁해 재정은 흑자였다. 버클리 대학교에서의 반전 운동에 대해 주 방위군을 불러 맞서며 '전통적인 미국을 지키는 투사'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주지사 임기 이후 대통령 후보에 도전했다가 한 차례 실패를 맛본 그는 4년 후 다시 대통령 자리에 도전해 공화당 경선에서 조지 부시를 꺾고 후보로 선출됐다. 당시 인기가 떨어진 지미 카터를 누르고 1981년 1월, 레이건은 미국 제 40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환하게 웃는 마거릿 힐더 대처(전 영국 총리)와 레이건. 이들은 '정치적 연인'이라 불릴 만큼 정치적 동지였다.


대통령직 2개월 만에 총상… 건강 악화의 출발점


그런데 불과 대통령 임기 시작 2개월 만에 레이건은 암살 위협에 부닥친다. 그해 3월 30일 그가 힐튼호텔을 나서던 중 당시 25살의 존 힝클리 주니어라는 청년이 레이건을 향해 22구경 리볼버 권총을 꺼내 2초도 안 되는 시간에 모두 6발이나 쐈다. 범인과의 거리는 불과 6걸음 정도로 가까웠다. 총을 쏜 이유는 정치나 신념과 관련 없었다. 황당하게도 대통령을 저격하면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 출연해 유명해진 여성 배우 조디 포스터의 관심을 끌어, 그녀가 자신에게 고백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범인은 진술했다.

총성 직후 경호원들이 제압해 백악관 대변인과 경호원 등이 마비되거나 크게 다쳤지만, 암살 대상이던 레이건은 살아남았다. 범인이 마지막으로 쏜 6번째 총알이 방탄 리무진에 맞고 튕겨 나가면서 레이건의 왼쪽 겨드랑이를 뚫고 폐에 박혔다. 총알은 그의 심장에서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큼 떨어진 곳에 멈췄다. 선홍빛 피가 레이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리무진으로 4분 만에 조지 워싱턴 병원에 도착한 후 간호사가 총에 맞은 대통령의 가슴을 지혈하려 손대자, 레이건은 "우리 아내 낸시에게 허락 맡았소?"라며 농담까지 건넸다. 수술하고 12일간 병원에서 치료받은 레이건은 큰 후유증 없이 퇴원했다. 이 사건으로 그의 지지율은 더 올라갔고, 총상에서도 살아남아 '아이언 맨'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1987년 레이건이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레이건의 건강은 급격히 쇠약해졌다. 대장암과 전립샘암까지 그를 괴롭혔다. 만 74살에 대장암 수술을, 76살엔 전립샘암 수술을 받았다.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 말을 타다가 넘어져 생긴 뇌출혈로 응급 수술까지 받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4년 그는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받는다. 알츠하이머병은 치매를 일으키는 가장 흔한 퇴행성 뇌 질환으로, 전체 치매의 3분의 2가량을 차지한다. 1907년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 박사가 처음 보고해 세상에 알려진 이 병은 서서히 발병해 기억력을 포함한 인지기능이 점차 나빠진다.


뇌세포 망가져 기억 잃고 충동 조절 힘들어


알츠하이머병의 정확한 발병 기전·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베타 아밀로이드(beta-amyloid)라는 작은 단백질이 과도하게 만들어져 뇌에 쌓이면서 뇌세포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게 치매 발병의 핵심 기전으로 알려졌다. 뇌세포의 골격 유지에 중요한 타우 단백질(tau protein)의 과인산화, 염증 반응, 산화적 손상 등도 뇌세포를 망가뜨려 치매 발병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치매(Dementia)의 어원은 라틴어로 마음(Mentia)을 잃는다(De)는 뜻이다. 치매 환자에겐 미래도, 과거도 없다. 충동 조절이 되지 않아 쉽게 화내고 욕한다. '노인이 다시 아이가 된다'는 말이 바로 이런 모습에서 비롯됐다. 혼자 먹을 수도, 소변과 대변조차 가리지 못하고, 끝내는 설 수도 없게 된다. 몸도, 마음도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1994년 11월 레이건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다고 대국민 발표했다. 레이건은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높아지기를 바랐고, 이 병의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1995년 그의 부인 낸시 여사, 국립 알츠하이머병 재단과 함께 로널드 낸시 레이건 연구소(Ronald and Reagan Research Institute)를 창설했다.

이후 1997년 10월에는 레이건은 자신이 대통령이었던 사실조차 잊는다. 길 가던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자 옆에 있던 아내에게 "저 사람들이 왜 내게 손을 흔들지?"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정신 혼미, 발작 증상도 나타났다. 1999년에는 신체기능이 급속히 악화했다. 레이건은 집 안과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고 만다.

2004년 6월 5일, 10년간 투병해 온 그는 캘리포니아의 자택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향년 93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총상에도, 대장암과 전립샘암에서도 살아남은 레이건은 결국 치매에 무너져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치됐다. 그가 1994년 국민에 쓴 편지의 글귀처럼 인생의 황혼을 향한 여정은 그렇게 끝났다.

그가 생전에 치매 치료법을 찾기 위해 연구소까지 차렸지만 2023년 현재까지도 치매를 치료하는 약은 개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찍만 발견하면 치매 진행 속도를 현저히 늦출 수 있다. 대표적인 약물인 아세틸콜린 분해효소 억제제는 치매의 진행을 6개월에서 2년까지 늦추는 데 효과 있다. 레카네맙 등 최근 개발된 치매 치료제는 알츠하이머병의 진행 속도를 25% 정도 늦추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뉴스1) 김진환 기자 = 김승겸 합참의장과 라캐머라 연합사령관이 27일 동해 상에서 한미 연합해상훈련 중인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항공모함을 방문하고 있다. (합참 제공) 2022.9.27/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Tip. 알츠하이머병 막는 10가지 수칙
①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 높은 콜레스테롤을 치료한다.
② 과음·흡연하지 않는다.
③ 우울증을 치료한다.
④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취미활동을 지속한다.
⑤ 머리 부상을 피한다.
⑥ 약물 남용을 피한다.
⑦ 환경이나 생활방식을 급격하게 바꿔 혼란을 주는 것을 피한다.
⑧ 의식주는 독립심을 갖고 스스로 처리한다.
⑨ 체력에 맞게 주 3일 이상 하루 30분 이상 적절한 운동을 한다.
⑩ 건강한 식습관을 실천한다.

자료=서울대병원 건강 정보.
참고 서적=『히틀러의 주치의들』(드러커마인드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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