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권순우에 대한 과도한 비난

머니투데이 양지훈 변호사(위벤처스 준법감시인) | 2023.10.10 02:02
양지훈 변호사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비인기 종목인 테니스에서 나왔다. 남자 테니스 단식 2회전에서 권순우가 태국의 카시디트 삼레즈에게 패한 후 분풀이로 라켓을 부쉈고 상대와의 악수도 거부하던 장면이 그것이다. SNS에서 이 장면이 복제된 후 네티즌들이 말을 보태면서 사태가 커졌다. 어떤 중국인은 권순우에게 평생 자격정지를 내리라고 비난했고 한국 언론도 이에 질세라 '나라 망신'을 운운하며 징계해야 한다는 보도까지 했다.

항저우에 있던 권순우는 자필 사과문을 써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삼레즈를 직접 찾아가 사과했지만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여러 커뮤니티에서 "권순우가 부끄럽다"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비판이 계속됐다.

테니스 애호가로서 한 마디 보태자면 권순우가 비매너 행동을 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비난받을 만한 행위를 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테니스에서 라켓 부수기는 프로테니스협회(ATP)가 주관하는 메이저 대회와 일반 투어에서 부지기수로 발생하는 해프닝이다. ATP 국제대회에서 협회는 라켓을 부순 선수에게 통상 200달러에서 5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회 본선에 진출한다면 1회전 출전 상금의 10%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말하자면 이 벌금은 약소한 경고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테니스의 신'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는 종종 경기 도중 라켓을 부수기도 하는데 게임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고의로 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올해 윔블던 결승에서도 라켓을 부쉈다). 얼마 전 열린 US오픈에서도 여자 랭킹 세계 1위 아리나 사바렌카(벨라루스)가 결승전에서 패배한 다음 자신의 라켓을 부수는 장면이 공개되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울면서도 꿋꿋하게 우승자를 축하해줬고 시상식이 끝난 뒤 홀로 라커룸에서 자신의 라켓을 부순 점은 권순우와 다르다.


그런데 조코비치나 사바렌카에게 권순우와 같은 비난이 쏟아진 적이 있는가. 세르비아나 벨라루스 국민들이 이들에게 사과를 강요하거나 협회에 징계를 요청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이들이 '국가대표'로 윔블던이나 US오픈에 출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메이저 테니스대회 결승전은 항저우 아시안게임 단식 2회전보다 전 세계에서 훨씬 더 많은 이가 TV 시청을 한다는 사실, 출전선수들의 국적이 ATP, WTA 대회 중계규칙에 따라 명백하게 표기된다는 사실 역시 지적돼야 한다. 강조하자면 테니스대회에서 라켓 부수기는 기본적으로 연극적인 요소가 있고 자해적인 행위로 피해자가 없으며 종종 발생하는 해프닝이다.

상대 선수나 심판과의 악수를 거부하는 일은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 게다가 이번 경기에서 권순우는 충분히 억울한 일을 당했다. 상대 선수는 1세트 후 화장실에 가서 10분 동안 돌아오지 않아 규정을 위반했으며 경우에 맞지 않는 메디컬 타임 요청으로 비신사적 행동을 먼저 저질렀다. 심판 역시 이에 대해 지적하고 페널티를 줬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권순우 선수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사정을 무시한 채 왜 이렇게 권순우에 대한 비난이 거센가. 한 가지 답은 한국인들 사이에 만연한 스포츠 국가주의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한 스포츠평론가는 피겨스케이팅에서 세계적인 스타가 된 김연아에 대한 "우리 연아" "대한민국의 딸"이라는 계면쩍은 호명에 대해 우리들의 내면에 새겨진 국가주의를 지적했다. 바로 그 김연아의 정확히 반대편에 겨우 2회전에서 탈락한 후 라켓을 부순 권순우가 자리한다. 국제대회에 출전한 한국 선수의 경기결과에 지나친 자랑스러움이나 과도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감정들은 이제 자제해야 한다. 항저우에서 라켓을 부순 권순우는 권순우의 일을 한 것이고 우리는 서울과 완주, 안동과 양구에서 우리의 테니스를 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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