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50주년... 여전히 요동치는 칠레[PADO]

머니투데이 김수빈 PADO 매니징 에디터 | 2023.10.08 06:00

편집자주 | 쿠데타로 집권해 인권 유린을 일삼았지만 경제 성장의 토대를 닦은 군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의 첫 자유무역협정 상대국인 칠레도 쿠데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은 이제는 어느 정도 쿠데타에 대한 합의가 형성된 반면 칠레의 분열은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그 중심에는 쿠데타에 끝까지 저항했던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있습니다. 아옌데의 비극적인 최후는 그를 정치적으로 냉정히 평가해야 할 역사적 인물보다는 신화적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아옌데를 추앙하는 37세의 젊은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를 대통령으로 만든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쿠데타 50주년을 맞아 아옌데를 재평가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아옌데 정부의 기술 정책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한 예브게니 모로조프의 팟캐스트 시리즈 '산티아고 보이즈'는 FT를 비롯한 많은 매체의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쿠데타 후 민주주의를 회복한 이후에도 칠레는 꾸준한 경제성장을 기록해 '남미의 모범생'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에는 더딘 성장과 분배의 문제로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보리치 정부의 헌법 개정 시도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매우 급진 좌파적인 개정안을 내놓았다가 국민투표에서 참패를 당했고, 그 여파로 극우파가 헌법위원회를 휩쓸면서 이번에는 극우적으로 기울어진 개정안을 내놓은 상태입니다. 칠레의 정치가 국민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기사 전문은 PADO 웹사이트(pado.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픽=PADO

칠레의 쿠데타는 거친 흑백의 이미지로 역사에 새겨져 있다. 1973년 9월 11일 아침 칠레 공군의 호커 헌터 제트기가 로켓을 발사하자 산티아고 중심부에 있는 대통령궁 라모네다(La Moneda)에서 연기 구름이 피어오른다. 탱크가 주변 거리를 순찰하고 군인들이 머리에 손을 얹은 민간인 포로 수백 명을 끌고 간다. 선거로 당선된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트위드 재킷과 철모를 쓰고 라모네다에서 권총을 휘두른다. 오후 2시가 되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전 세계는 곧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이름을 알게 된다. 그는 아옌데에 대한 폭력 쿠데타의 주역이었고 향후 17년간 칠레를 독재로 통치한다.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칠레의 쿠데타는 상징적 의미를 빠르게 획득했다. 칠레 국민들이 쿠데타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하는 지금, 쿠데타의 여운은 여전히 남아 있다. 칠레의 국가수반인 젊은 좌파 대통령 가브리엘 보리치는 아옌데의 팬임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취임식 당일, 그는 라모네다 뒤편에 있는 아옌데의 동상에 경의를 표하고 지지들에게 한 연설에서 그를 언급했다.

그러나 아옌데가 여전히 불러일으키는 논란으로 인해 정부의 50주년 기념 계획은 차질을 빚고 있다. 대통령이 쿠데타에 대한 "거부를 상징하는 국가적 의식"을 준비하기 위해 임명했던 언론인 파트리시오 페르난데스는 "[쿠데타가] 왜 일어났는지는 역사적으로 계속 논쟁이 될 것"이란 발언으로 공산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7월에 사퇴했다.

칠레는 분열된 듯하다. 보리치 정부는 지난해 부분적으로 피노체트가 만든 칠레 헌법을 개정하려 했지만 국민투표에서 무려 62%의 반대로 부결됐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쿠데타가 민주주의를 파괴했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42%에 지나지 않았고 36%는 쿠데타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칠레를 해방시켰다고 답했다. 2006년에는 이렇게 답한 이들이 각각 68%, 19%였다.

국론의 분열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반영한다. 칠레와 다른 국가들의 좌파를 반세기 동안 괴롭혀온 의문 하나는 아옌데의 전복이 단순한 군사적 패배였는지, 아니면 무엇보다도 정치적 실패였느냐다. 이와 연관된 두 번째 의문은 쿠데타를 피할 수 있었느냐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옌데 정부가 전복되기 전 천여 일 동안을 되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1970년에 당선된 아옌데는 의회를 통해 평화적으로 혁명을 수행하려는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의 정당연합인 인민연합(UP)은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칠레는 분열되고 혼란에 빠졌다. 많은 칠레 국민과 대다수 정치인들은 쿠데타를 환영했다. 군부가 질서를 회복하고 새로운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옌데를 민주주의의 순교자이자 세계적인 좌파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쿠데타의 잔인함과 그 여파였다. 이후 민주 정부 하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피노체트 군부 정권은 2130명을 살해하고 적어도 3만 명을 고문했다. 다른 하나는 오전 9시 10분 라모네다에서 방송된 아옌데의 저항적인 마지막 대국민 연설이었다. 7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연설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배경에서 들리는 고함소리 속에서도 침착하고 차분했다. "저는 사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옌데는 선언했다. "국민의 애국심에 제 목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항상 기억하십시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유인들이 오가는 위대한 길은 조만간 다시 열릴 것입니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복잡하고 모호한 인물이었다. 의사였던 그는 자칭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대통령'이기도 했지만 많은 연인을 두고 화려한 삶을 즐기는 남성이기도 했다. 그는 쿠바의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의 우정에 기뻐하며 그를 칠레로 초청해 20일 동안 칠레를 여행할 수 있게 했다. 아옌데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질서를 해체하고 이를 국가 통제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는 스칸디나비아식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혁명과 계급 투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경험이 풍부한 칠레 국회의원이자 전 상원 의장이었으며 정중하며 매력이 넘치는 사람으로, 자신의 정치적 '무녜카'(muneca), 다시 말해 협상력과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재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합법적으로 혁명을 이루겠다고 주장했다.

(계속)



PADO 웹사이트(https://www.pado.kr)에서 해당 기사의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국제시사·문예 매거진 PADO는 통찰과 깊이가 담긴 롱리드(long read) 스토리와 문예 작품으로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을 자극하고, 급변하는 세상의 조망을 돕는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합니다.



베스트 클릭

  1. 1 "정준영은 어둠의 자식"…과거 절친 인터뷰 재조명
  2. 2 "지하철서 지갑 도난" 한국 온 중국인들 당황…CCTV 100대에 찍힌 수법
  3. 3 평소 덜렁대는 딸 "엄마, 나 폰 박살났어"…순식간에 5000만원 사라졌다
  4. 4 김호중, 뺑소니 피해자와 합의했다…"한달 만에 연락 닿아"
  5. 5 괴로워하는 BTS 진…'기습뽀뽀' 팬, 결국 성추행 고발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