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진칼럼]에스토니아 1944

머니투데이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 2023.10.04 16:11
김화진 /사진=김화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 구시가는 꼭 동화책같이 생겼다. 탈린 성벽과 탑들은 1265년에 처음 건축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번 증축된 것이다. 물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구시가 안에 Olde Hansa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는데 내가 가 본 모든 레스토랑 중 가장 고색창연했다. 그 건물은 1657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그 전에 지어졌는데 무너져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외국에서 들여온 물건들을 쌓아두는 창고로 쓰였다. 레스토랑은 음식과 주류, 인테리어와 종업원 복장 모두 한자동맹 시대를 재현했다.

중세도시 탈린은 그러나 첨단 디지털 산업도시다. 2007년에 글로벌 디지털 도시 톱10에 들었고 유럽연합(EU)의 IT(정보기술) 기관과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사이버방위센터가 있다. 스카이프의 발상지인데 유럽에서 인구 대비 스타트업 수가 가장 많은 도시다. 스카이프 창업자이자 억만장자의 이름도 얀 탈린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잘 찾아지지 않는다. 국토의 48%가 삼림지대인 에스토니아의 주산업은 농업, 건설, 전력이다. 1인당 GDP는 4만6000달러로 러시아의 3만5000달러보다 높다. 우리나라는 5만6000달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가장 놀랐던 나라들이 에스토니아를 포함한 발트3국이다. 세 나라는 러시아, 벨라루스, 그리고 러시아의 월경지이자 발틱함대가 있는 칼리닌그라드로 에워싸여 있다. 폴란드도 국경을 맞대고 있기는 한데 그리 길지 않다. 100km다. 수바우키 회랑이라고 불린다. 러시아가 칼리닌그라드로 화물열차를 보내는 데 쓰이고 있다. 평지인 데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이어서 2차 세계대전 개전 구실이 된 단치히 회랑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수바우키 회랑은 그래서 별명이 'NATO의 아킬레스건'이다.

발트3국은 공통점이 많지만 맨 위의 에스토니아를 여행해 보면 사람들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북유럽의 스웨덴, 핀란드 계열이다. 다른 두 나라는 러시아, 동유럽 계열이다. 스웨덴과 핀란드 사람들이 그렇듯이 영어도 아주 잘한다. 경제성장이 빨라서 '발틱 타이거'라고 불린다. 스위스와 크기가 거의 같은 에스토니아는 약 2000개의 섬도 가지고 있다.


국가 또는 민족으로서 에스토니아의 정체성은 1850년대에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러시아화가 진행되었다. 독일어와 에스토니아어가 사용되고 있었는데 러시아어로 강제 대체되었다. 20세기 들어서 다시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발생했지만 러시아가 진압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1918년 2월에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바로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했지만 같은 해 11월에 독일이 패전하면서 다시 정부가 복귀되었다. 같은 달 소련이 침공해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에스토니아는 소련을 물리치고 1920년 2월 2일에 독립국으로 인정되었다.

에스토니아의 3대 도시이자 최동단인 나르바는 162m 길이의 작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의 이반고로드와 연결된다. 이반고로드는 원래 에스토니아 영토였는데 1945년에 소련이 떼어간 곳이다. 1492년에 지어진 성채가 자리하고 있다. 2차 대전 때 나르바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구소련은 원주민들을 귀향하지 못하게 하고 러시아인들만 이주를 허용해 러시아계 비중이 높아졌다. 에스토니아 독립 후에도 러시아계 주민들은 별 불편 없이 살아왔다. 대다수가 EU 시민의 지위에 만족했다. 그런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로는 다들 마음이 불편해지고 이반고로드와의 왕래도 줄었다고 한다. 이름이 '우정의 다리'인데 이제 다리를 건너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다.

에스토니아는 2차 대전 동안 처음에는 소련, 다음에는 독일, 다시 소련의 점령을 당했다. 그래서 청년들이 양쪽으로 징집되어 전장으로 나갔고 전쟁 막바지에는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 싸우는 경우도 발생했다. 에스토니아 영화 '1944 Brothers Enemies'(2015)가 그 소재다. 전장에서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되면 조용히 헤어진다. 이 영화는 러시아에서는 상영금지되었는데 에스토니아에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IMDb에서도 평점이 7.5로 상당히 높다. 에스토니아 1944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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