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위기라는 말처럼 인생의 중반에 이르러야 깨닫는 것들이 있다. 여태 행복한 미래를 위해 아껴놓았던 시간들이 이자를 불리기는커녕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 청춘을 바쳐온 일들이 덧없이 여겨진다. 이제부터 나의 인생을 중심에 두고 순간을 놓치지 말자며 사표를 던지고 긴 여행을 떠난다거나 적금을 깨서 자신에게 명품을 선물하기도 한다. 아직도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하는 40대, 50대는 영포티, 영피프티라 불리며 디지털기술과 소통문화에도 익숙한데 오늘날 SNS가 크게 성장한 것도 이렇게 X세대부터 MZ세대까지 이어지는 플렉스(flex), 즉 과시적 향유문화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마치 '오늘만 살고 말 것 같은' 충동적인 삶, 즉 유희와 낭비의 문화는 금전숭배나 물질중심주의에 가까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낭비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도구라고 한 것은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큰 영향을 끼친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였다. 낭비는 돈을 소중히 여기기보다 오히려 우습게 보는 것이다. 아끼는 것이 소중함의 증거라면 낭비하는 것은 멸시의 증거이지 않겠는가. 가끔 기사화되기도 하는 누리꾼들의 적극적인 기부행위에서도 이와 비슷한 태도를 발견한다. 예를 들어 어떤 가게나 개인사업자의 선행이 알려지면 누리꾼들이 달려가 '돈쭐'을 내고 왔다고 인증 릴레이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돈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값비싼 무엇이 아니라 받는 사람에게 일종의 벌(혼쭐)이 될 수 있는 것, 즉 부정적인 것처럼 표현된다. 이 때문에 누군가를 돕는 행위지만 잘난 척하거나 시혜적인 태도가 없는 것이다. 플렉스가 쿨하게 여겨지는 이유도 비슷하다. 돈으로 남을 기죽이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들을 비웃는다. 나의 가치는 나의 통장 잔고로 증명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소비행태는 단순한 허세일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미래 중심 담론들의 한계를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우리 일상의 다양한 즐거움들을 박탈하는 이데올로기들 말이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강조하는 것은 규범적 사회의 재생산을 중시하는 보수주의나 발전적 역사의 미래를 꿈꾸는 진보주의나 매한가지다. 성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하위문화의 한 슬로건이 '미래는 없다'(No future!)였던 것을 기억한다. 내일의 행복을 꿈꾸며 오늘을 버티라는 기성세대에게 '우리는 미래를 거부한다'는 이 도발은 효율과 생산성이 지배하는 현 문명에 대한 비판이자,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목적에 부정돼온 다양한 사람들의 외침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가치를 독점하면서 생산성만 강조하는 사회경제적 시스템이 지구환경과 인류의 위기를 낳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양한 삶의 존재뿐 아니라 그들의 현재를 존중하지 않으면 미래가 계획될 수 없고 저출생 문제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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