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곧 국력인 시대를 맞아 '기술독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향은 글로벌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기술독립은 1970년대 기술선도국을 추격할 때 유효한 표현이란 의미다. 현시점에선 '대체 불가능한 기술'을 기반으로 글로벌 협력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6일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IFS) 공동주최 포럼에서 "로빈슨 크루소식으로 모든 기술을 자급자족해선 안 된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교수는 이날 '기술패권 시대, 글로벌 협력 전략'을 주제로 기조발제했다.
로빈슨 크루소는 소설 속 주인공으로 무인도에서 자급자족하며 인간의 지혜와 한계를 보여준 인물이다. 이 교수의 크루소 발언은 전 세계 기술과 산업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모든 기술을 자급자족하겠다는 접근은 맞지 않다는 의미다.
이 교수는 "글로벌 가치사슬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다른 국가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기술주권 확보는 불가능하다"며 "기술독립은 '우리가 모든 기술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가정을 전제하나 이는 1970년대나 적절했던 닫힌 생태계를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술 하이라키(Hierarchy·층위)를 보면 어떤 기술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며 "mRNA(메신저 리보핵산) 백신과 반도체 사례를 보면 세부기술은 여러 국가가 대륙을 건너 상호 협력해 만들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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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국제협력, '축적의 시간' 필요━
이 교수는 "국제협력은 퍼즐 맞추기처럼 상호 간 필요한 영역을 채워주는 데 있다"며 "여기서 대체 불가능한 기술이 있는지가 중요하며 우선 대체불가능한 영역에 집중 투자해서 기술적 역량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과학기술 국제협력을 위해선 장기적·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과학기술 R&D와 국제협력 특성상 연구기획에서부터 협력 효과, 성과 도출까지 오랜 시간이 요구되며 초기 단계에선 성과가 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은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전략기술이 무엇인지 식별하고, 미국의 내제적 역량 평가와 더 나아가 누구와 협력할지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이 대목에서 언급한 프로젝트는 '국가핵심기술평가네트워크'(National Network for Critical Technology Assessment)다. 이 네트워크는 지난해 9월 400만달러(약 50억원)를 투자해 미국이 국가적으로 필요한 전략기술과 협력 대상 등을 추리고 있다.
이 교수는 "국제협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체 불가능한 우리만의 기술을 갖추는 노력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이해·수용할 수 있는 역량"이라며 "대체불가능한 기술에 대한 전략적 투자와 함께 기초과학 저변 확대도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현 정부는 내년도 정부 R&D 예산은 올해 대비 5조2000억원(16.6%) 깎은 25조9000억원으로 편성했다. 특히 12대 국가전략기술 분야와 국제협력 예산을 대폭 늘리겠다고 공언해 연구계가 반발하고 있다. R&D예산 일괄삭감으로 연구 생태계가 무너지고, 국제협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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