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또다시 관객을 움직인 거장의 도전과 성취

머니투데이 정유미(칼럼니스트) ize 기자 | 2023.08.17 09:48

개봉 이틀만에 70만관객! 극장가에 또다시 놀란 신드롬

사진=유니버설픽쳐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전기 영화이자 정치 드라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12번째 영화 ‘오펜하이머’가 15일 국내 개봉했다. 놀란 감독과 그의 작품에 대한 한국 관객의 애정과 관심을 입증하듯 사전 예매량 50만 장을 돌파하며 개봉 후 이틀 동안 관객 70만 명을 기록했다. 박스오피스 1위로 순조롭게 출발한 놀란 감독의 신작은 엔터테이닝의 극강을 선사한 대표작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과 다른 종류의 블록버스터다. 장르적 스펙터클보다 더 강력한, 밀도 높은 감정의 스펙터클로 승부한다.


블록버스터를 강조했지만 ‘오펜하이머‘는 엄연히 전기 영화다. 놀란 감독의 전작들이 보여준 시각적 쾌감과 ‘원자 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주인공으로 한 실화 기반 블록버스터의 일반적 형식을 예상하고 극장에 간다면 적잖이 당황할 수도 있다. 물론 놀란 감독의 색다른 스타일과 연출 기법을 기대하고 본다면 영화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높은 완성도로 채워져 있다.


사진=유니버설픽쳐스


‘오펜하이머’는 전기 영화도 놀란 감독이 만들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리학을 녹인 ’인터스텔라’ ‘테넷’을 만든 놀란 감독이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생애에 주목하고 영화로 만든 건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진다. 2006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1,15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놀란 감독 특유의 시각적 스토리텔링으로 러닝타임 3시간에 구현한다.


작품마다 시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에서 꺼내든 장치는 흑백과 컬러의 활용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컬러는 ‘핵분열 Fission’, 흑백은 ‘핵융합 Fusion’이라는 자막이 뜬다. 핵분열 실험을 이끈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주관적 시점은 컬러로, 그가 반대한 수소폭탄(핵융합 폭탄) 개발을 추진한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제독이 중심인 장면에는 객관성을 부여해 흑백으로 표현했다. 영화는 시간대가 다른 두 세계를 오가며 대립 관계인 두 인물을 비교선상에 놓는다. 두 실존 인물의 충돌은 천재의 오만함과 평범한 사람의 굴욕이 빚은 파국 등 여러 갈래에서 흥미롭게 읽힌다.


사진=유니버설 픽쳐스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이머의 63년 일생 중에서 극적인 순간들에 집중한다. 유년기와 말년은 다뤄지지 않는다. 방황하는 물리학도였던 청년기부터 2차 세계대전 중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어 원자 폭탄 실험에 성공하는 과정은 전기 영화의 순차적 흐름을 따르면서 진행이 굉장히 빠르고 밀도가 촘촘하다. 여기에 오펜하이머가 몰락하는 1954년 특별 안보 청문회와 1959년 스트라우스의 상무장관 인준 청문회까지 시간대가 다른 세 개의 굵직한 이야기가 융합되어 정치 역사극으로 뻗어나간다. 놀란 감독이 치밀하게 설계한 두 청문회 장면은 각기 다른 성격으로 법정 드라마의 묘미까지 일으킨다.


세계 최초의 핵무기 실험 ‘트리니티 실험’ 장면은 역사적 현장 속에 있는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전쟁 블록버스터 ‘덩케르크’에서 전쟁을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았던 놀란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윤리적 태도를 유지한다. CG를 사용하지 않고 실제 폭발을 촬영해 완성한 장면은 지금까지 보아온 핵폭발 관련 영상을 통틀어 가장 복잡다단한 감상에 빠져들게 한다. 영화 속에서 폭파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저절로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 놀란 감독은 핵시대가 도래하는 순간을 재현해 지금까지 현실 공포로 자리 잡은 핵무기의 위력을 실감하게 만든다. 규모와 스펙터클에 집착하지 않은 연출은 세상을 꿰뚫어 보는 힘을 발휘한다. 트리니티 실험 장면은 단연 명장면이고, 반드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봐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사진=유니버설픽쳐스


놀란 감독이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그리는 방식이야말로 ‘오펜하이머’가 그의 전작들을 포함해 다른 전기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와 관련한 여러 인터뷰에서 “흥미롭고 입체적이며 모호한 캐릭터에 끌린다”고 밝혔다. 영화 속 오펜하이머는 그가 말한 캐릭터 그대로다. 나약하고 불안한 존재이면서 성공과 야망을 가진 과학자이고 오만과 거짓으로 위기를 자초한다. 평화를 위해 핵무기를 만드는 데 앞장섰으나 나중엔 핵무기 개발에 반대했다.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의 모순과 갈등을 사운드, 화면 기법으로 극대화해 캐릭터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킬리언 머피는 스크린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배우의 이름을 완벽하게 지우고 오펜하이머로 존재한다. 그의 연기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다.


킬리언 머피를 비롯해 ‘오펜하이머’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폭발하는 작품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그를 ‘아이언맨’으로만 기억하는 젊은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길 정도로 연기 진가를 드러낸다. 오펜하이머의 아내 키티를 연기한 에밀리 블런트는 후반부 청문회 장면의 활약만으로도 내년 오스카 후보감이다. 맷 데이먼, 조시 하트넷, 제이슨 클락, 베니 사프디, 케이시 애플렉, 라미 말렉, 데인 드한, 올든 에러라이크, 매튜 모딘, 그리고 게리 올드만까지 배우들의 호연이 이 영화의 주요 에너지다.


사진=유니버설픽쳐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펜하이머’로 또 한 번 관객들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다. 그의 신작을 즐기기 위해 사전 정보를 어느 정도 습득해야 하는지, 어떤 상영 포맷으로 봐야 좋은지 고민하게 한다. 매 작품마다 도전과 성취를 이루는 놀란 감독도 놀랍지만, 관객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끄는 놀란 감독은 존재만으로도 귀하고 특별하다. ‘오펜하이머’를 좀 더 깊이 즐기고 싶다면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 ‘전쟁의 종식자: 오펜하이머와 원자폭탄‘(쿠팡 플레이)를 함께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를 통해 놀란 감독이 일으키는 나비 효과의 힘은 점점 거세지는 듯하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로 보게 하는 이 힘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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