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휴전을 위한 한국전쟁의 교훈[PADO]

머니투데이 김동규 PADO 편집장 | 2023.07.08 06:00

편집자주 |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러모로 한국전쟁을 닮았습니다. 현재 이 전쟁을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가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7월/8월자 포린어페어스의 기사는 한국전쟁의 휴전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와 한국을 비교하는 이 기사는 양 전쟁의 비교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현 상황을 더 명확히 이해하도록 하는 동시에 한국전쟁 당시 상황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볼 기회를 줍니다. 특히 한국 독자들에게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진 당시 한국전쟁의 상황을 우크라이나를 통해 다시 한번 살펴볼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소중한 기사입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휴전협정 노력을 방해하면서 군사적 지원, 경제적 지원,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는 장면은 (미국으로서는 분통 터지는 이야기겠지만) 우리로서는 곰곰히 생각해 볼 점이 많습니다. 장문의 이 기사를 꼼꼼히 읽고 기억해 두면서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떻게 끝나게 될 지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어떤 전쟁이었고 어떻게 '휴전'이라는 이름의 평화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기사 전문은 PADO 웹사이트(pado.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 국사편찬위원회는 오는 27일 판문점에서 개최되는 남북정상회담을 맞아 한국전쟁 당시 판문점의 모습과 판문점에서 이뤄진 휴전협정 과정을 담은 사진들을 19일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하는 사진은 국편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모습. 왼쪽 책상에 앉은 이가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이고 오른쪽 책상에 앉은 이가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 대장이다. 현재 조인식장 건물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어 북한 측에 편입된 상태이다. 직접 방문할 수는 없지만 판문점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8.4.19/뉴스1

1952년 8월 중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6400km 가량 떨어진 모스크바로 향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의 특사로 파견된 것이다. 당시 두 공산 국가는 동맹국이었지만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련은 초강대국이었고 중국은 소련에 경제지원과 군사장비를 의존하고 있었다. 2년 전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북한 지도자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면서 일종의 합작사업을 시작했다. 미국이 즉각 남한 지원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침공 직후 김일성에게 전보를 보내 "조만간 개입주의자들이 불명예스럽게 한반도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상황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950년 가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북한으로 진격하자 중국이 참전했다. 1951년 중반이 되자 침공 전 북한과 남한을 구분하던 38도선을 따라 피비린내 나는 교착 상태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해 7월부터 양측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의 목적은 휴전에 도달하고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로 교환에 관한 세부 사항으로 인해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52년 여름 저우언라이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공산군의 상황은 암울해 보였다. 공습으로 북한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고 모든 도시가 큰 피해를 입었다. 식량도 부족했다. 그 해 2월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전쟁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약 5개월 후,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조속한 휴전"을 간청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은 미국의 요구에 맞서 굳건히 버티기로 결심했고, 김일성만큼 전쟁상황에 대해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도 자신의 나라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냉전 기간 동안 저우언라이는 냉철한 외교관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런 저우언라이도 나쁜 소식을 들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상태에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의 임무는 스탈린이 휴전에 얼마나 마음이 열려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 전쟁의 배후였기에 전쟁을 중단하자는 이야기를 들으면 불쾌해 하리라 간주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면담은 8월 20일에 이뤄졌다.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이 미국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높일 수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저우언라이는 "양측의 전력은 거의 대등하다"고 자신감을 표명했지만 중국의 "전면적인 공세는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즉, 미국을 압박할 수 있는 마땅한 군사적 옵션이 없다는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스탈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마오쩌둥은 전쟁이 계속되는 것이 미국의 새로운 세계대전 준비를 방해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말이 맞다"고 단언했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 전쟁은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북한은 사상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 미국인들은 이 전쟁이 자기들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전쟁을 끝내고 싶어한다 … 우리쪽은 조급할 필요가 없다. 인내가 필요하다." 저우언라이는 "스탈린 동지의 관찰이 정확하다"고 찬사의 말을 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현실을 전하려 했다. 그는 북한 주민들이 "다소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약간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북한 지도부 일부에서는 심지어 공황 상태까지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에 스탈린은 "이미 이러한 감정을 알고 있다"고 대답하며 짜증을 내는 듯했다. 저우언라이는 물러섰다.

한 달 후 저우언라이는 다시 스탈린에게 휴전을 수락하고 포로 교환에 관한 논쟁적인 세부 사항을 미루는 것이 어떨지 문의했다. 스탈린은 이 제안을 "여러 가능한 시나리오 중 하나이지만 미국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이 타협을 포기하고 계속 밀고 나가기를 원했던 것이 분명했다. 저우언라이는 스탈린의 조언에 동의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스탈린의 말에 대해 저우언라이는 "값진 지시 말씀"이라고 찬사의 말을 했다.

이후 10개월 동안 전투가 이어졌고, 양측은 저우언라이와 스탈린이 논의했던 것보다 중국과 소련에 약간 불리한 조건으로 휴전에 합의했다. 그 기간 동안 수만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전체 전쟁 기간 동안 36,574명의 미국인이 사망하고 103,284명이 부상을 입었다. 중국측은 약 100만 명이 사망했고, 한반도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400만 명(남북한 합친 수)이 사망했다.


= 국사편찬위원회가 6.25 전쟁 발발 68주년을 앞둔 22일 한국전쟁 관련 사진자료 중 일상과 평화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자료를 선별해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한 자료는 국편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으로, 국편 전자사료관 누리집에서도 열람할 수 있다. 사진은 1951년 7월 8일 유엔군과 공산군이 개성에서 열린 휴전회담 예비회담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2018.6.22/뉴스1

휴전으로 유혈 사태는 종식되었고, 비무장 지대가 설정되고 규정 준수를 감독하고 위반 사항을 중재하는 메커니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공식적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주요 정치적 쟁점들이 해결되지 않았고, 휴전협정 체결 후에도 국지적 총격전, 공습, 포격, 간헐적인 전투가 발생했다. 하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휴전이 유지되었고 70년이 지난 지금도 휴전 상태는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는 여전히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어 있는 지역이다. 북한은 주민들을 잔인하게 억압하고 핵무기로 이웃 국가들을 정기적으로 위협하는 독재자가 통치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대학살은 이제 먼 옛날의 일이며, 휴전으로 인한 평화 덕분에 한국은 탄탄한 경제를 발전시키고 결국 안정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휴전은 성공적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를 황폐화시키고 있는 전쟁은 한국전쟁과 지나칠 정도로 닮아 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한국 휴전의 지속성과 휴전 지연으로 인해 초래된 막대한 인적 비용을 면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유사점은 분명하다. 70년 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에서도 교착상태의 전선과 해결되기 어려운 양국의 입장 차이로 인해 일단 폭력 사태를 멈추고 까다로운 정치적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는 휴전이 필요하다. 역사학자 스티븐 코트킨은 한국전쟁 휴전으로 "한국은 미국의 안전보장과 보호 아래 번영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비슷한 형태의 휴전으로 우크라이나 또는 우크라이나의 80%만이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번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휴전을 이끌어낸 협상은 길었고 어려웠으며 치열한 전투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쟁의 비용과 고통이 너무 커져 어느 한 쪽이 타협하게 되면서 휴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전쟁의 경험을 보면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타협도 싫어하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완고함이 특히 방해가 될 수 있다. 게다가 미국의 국내 정치, 그리고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나름 타당하지만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휴전을 방해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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