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한 차림을 한 직원 앞에 섰다. 그가 내게 물었다.
"주문하시겠어요?"(직원)
"네, 혹시…여기서 제일 인기 없는 메뉴가 뭘까요?"(나)
직원은 이게 뭔 말인가 싶어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침착했다. 이내 능숙한 추천이 이어졌다.
"음, 저희 매장에서는 이 음료가 가장 안 팔리고 있어요."(직원)
"아, 그걸로 주문할게요!"(나)
메뉴 이름은 비밀(음료 개발한 분이 상처받을 수 있으므로). 설명하자면, 에스프레소와 흑당 시럽과 시나몬의 다소 낯선 조합이었다. "시나몬 괜찮으시겠어요?" 주문할 때 들린 직원 말이 조금은 불안했지만. 별수 없다. 이미 결제는 끝났다.
어우러지고 나니 맛이 썩 괜찮아졌다. 뭐랄까, 수정과에 커피 섞은 낯선 맛인데 중독성 있었다. 음료는 금세 사라지고 바닥엔 얼음만 남았다.
그리 평소 익숙했던, 또 반복해왔던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보고 있었다. 다음은 그리 소심하게 떠나본 작은 모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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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가 '가장 짧은 길' 알려줬으나, 꺼버리고 맘대로 갔다━
편안함에 기대고픈 마음을 누르고 앱을 껐다. 끄는 순간 바보가 됐다. 갈 방법이 생각이 안 났다. 길이 있으면 가겠지, 용기를 냈다. 내 멋대로 경로를 짜봤다. 어느 구간까진 따릉이(자전거)를 타고, 양화대교는 걸어서 건너가기로. 햇살 좋은 날이라 한강 바람을 쐬고 싶었다.
꾸역꾸역 페달을 밟았다. 땀이 금세 줄줄 흘렀다. 버스 에어컨 바람이 그리워졌다. 괜히 했나 싶어 후회했다.
기꺼이 돌아가고 마음껏 헤매었다. 서울에 처음 여행을 온 사람이 된듯했다. 정 안 될 땐 지도를 봤다.
하나라고 생각했던 길은, 가보니 실은 너무 많았다. 버스나 지하철이나 차로만 갈 수 있다고 여겼으나 아녔다. 자전거나 걸음으로도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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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차트도, 추천도 잊고━
안양천에 다다랐을 땐 초록이 무성한 산책길을 만났다. 흙을 밟고 싶어 자전거에서 내려 걸었다. 순간 음악을 듣고 싶어 앱을 켰다. 자연스레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려다 멈칫했다. 핫 100이나 해시태그가 잔뜩 달린 추천 음악 같은 것에서도 잠시 해방돼 보고 싶었다.
새로 나온 음악을 전부 재생해봤다. 평소 안 듣던 온갖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무명 가수도 많았다. 덕분에 그들이 품고 있을 꿈도 하나씩 들어볼 수 있었다. 음악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여름이 오면 푸른 햇살 아래 두 손을 꼭 맞잡고 산책을 하자던. 네가 좋아하는 버드나무 길."(손혜은 - 여름이 오면)
"자꾸 생각이 나. 어찌 된 건지 몰라. 오늘 뭘 해도 안 돼. 너만 생각이 나."(유해준 - 자꾸 생각이 나)
"당신이 침입하면 난 미쳐 죽어.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라! 당신은 주거 침입죄. 사랑의 주거 침입죄."(박태원 - 사랑의 주거침입죄)
그러니 당연하게도, 노래 부르는 가수가 이름만 대면 바로 아는 그런 이들만 있는 게 아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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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와, 눈에 띄는 자리의 책들도 벗어나 보고━
합정 서점에 들어섰다.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엔 베스트셀러 책들이 놓였다. 유명한 것들이라 제목이 익숙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 아주 잘 보이는 곳마다 서점 MD의 추천 책이 놓였다. 평소라면 뒤적거렸겠으나, 그날은 스쳐 지나갔다. 좋은 책은, 숨어 있을 수도 있다며.
책이 잔뜩 꽂힌 벽면에 갔다. ㄱ(기역)부터 ㅎ(히읗)까지 있어 어지러웠다. 불편함을 택하면 또 무언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숨을 고르고 제목을 찬찬히 보았다. 마음에 뭔가 떠오르면 꺼내어 읽었다.
"위로는 반드시 말이 아니라, 어떤 풍경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나에게 위로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이고, 할아버지의 주름진 웃음이고, 코스모스 색깔의 가을 하늘이고, 김창완 아저씨의 노래이다."(고수리 -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지금의 인생 옆에 또 하나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살아가는 것이 편해진다."(이치다 노리코 - 올해의 목표는 다정해지기입니다)
"에고는 필사적으로 안전을 원한다. 반면에 영혼은 진정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한 가지 진리는 이것이다. 모험 없이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없으며, 시련 없이는 깊어질 수 없다는 것."(캐럴 피어슨 - 나는 나)
시간이 오래 걸렸고, 쪼그리고 두리번거리느라 체력이 많이 빠졌으나. 보물을 발견한 듯하여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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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떡볶이 가게가 보여서…그냥 들어갔다━
허기가 몰려와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익숙한 동네로 갔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보고 끌리면 들어가 보자고.
마침 동네 초등학생이 걸어가는 게 보였다. 손에 쥔 컵엔 떡볶이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발그레 한 소스가 너무 맛나 보였다.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상한 사람 아닌데요(정말이에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나)
"(움찔)네에."(움찔한 초등학생)
"죄송한데…혹시 이 떡볶이, 어느 가게에서 샀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나)
"아, 여기 짱 맛있어요. 쭉 가시면 O떡볶이라고 나와요!"(신나서 알려주던 초등학생)
쫄깃하면서도 알맞게 익어 보들보들한 떡볶이. 입에 넣는 순간, 오래 넣어둔 어딘가의 기억이 꺼내어졌다. 학원이 끝나면 책가방을 메고, 한 접시에 1000원 밖에 안 했었고, 친구와 붙어먹으면 세상 행복했던. 딱 그 맛이었다. 순식간에 다 털어먹고, 2000원 어치를 더 포장해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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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만 다 모여 있던, 파리 어느 맛집에서━
거기는 대체 누구의 '선택지'였을까.
앞에서 했던 작은 모험. 실은 그리 대단한 교훈이 담긴 메시지는 없다. 엄청 즐겁기만 하거나 오롯이 재밌는 것도 아녔다. 외려 약간의 불안이 늘 동반됐다. 그런데 그래도 괜찮았다.
그건 오롯이 '내 선택'이었으므로.
처음 알게 됐다. 선택지가 남들이 다 쫓는 것에만 있지 않단 것을. 나만의 방법도 괜찮단 걸. 차로 100번 넘게 건너다녔던 양화대교에서, 콘크리트 사이로 가만히 삐죽 솟은 들풀을 처음 발견하며 '그래도 좋은 거였네'하며 실실 웃었다.
평소 찾고 싶었던 게 뭘지 생각한다. 고민한다. 답이 금방 나오질 않는다. '강아지'를 입력했다. 조회수가 높은 것 위주로 나온다. 올라온 날짜 순으로 나열했다. 30명이 본 것도 나오고, 55명이 본 것도 떴다. 빠짐없이 나왔으면 싶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남의 은하수가 아니었다.
나만의 견고한 별 하나였다."
- 김민철 작가, 모든 요일의 여행 中
실은 괜찮을까 싶어 여전히 좀 두렵다. 그래서 어느 여행의 기억을 하나 더 꺼내본다.
어느 여름, 스페인 바르셀로나였다. 맛있다며 찾아간 유명 카페는 휴일이라 닫혀 있었다. 검색하려는데 인터넷이 잘 안 터졌다.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아내와 난 순간 정지됐다. 우린 이미 길을 찾느라, 또 무더위에 지쳐 있었다.
별 수 없이 그 옆의 아무 카페나 들어갔다. 안경을 쓴 바리스타가 주문을 받았다. 라떼를 주문해서 마셨다.
검색해도 결과값이 하나도 나오지 않던, 기대 하나 안 했던 그 가게.
그런데 거기가 스페인에서 먹은 커피 중 가장 맛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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