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꿈꾸는 암 정복의 날…"끝없이 혁신, 천년 느티나무 돼 달라"

머니투데이 대담=김명룡 바이오부장, 정리=안정준 기자 | 2023.06.19 14:55

[머투 초대석]김승호 보령 회장②

김승호 보령 회장이 13일 서울 종로구 보령 본사에서 머니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올해로 92세, 제약업계 1세대 경영인인 그는 후배 경영인들에게 "혁신은 나 자신뿐 아니라 주변사람까지 행복하게 만든다는 점을 기억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사진=김휘선 기자
"어려웠던 시절, 그나마 약을 살수 있다면 다행이었습니다.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은 애타는 마음으로 산속 깊이 들어가 약으로 쓸 만한 풀을 캤습니다. 살면서 저도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들이 병마와 싸우는 동안, 산에 올라 약으로 쓸 만한 풀을 베어오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제약업에 종사한 지 60년을 넘긴 지금도 그 마음은 매한가지입니다."

한국전쟁 직후 집을 팔아 마련한 돈 300만환(현재 기준 4000만원)으로 종로 5가에 세를 얻어 마련한 3평 규모의 보령약국을 오늘날 연 매출 약 8000억원의 한국 대표 제약기업 '보령'으로 일으킨 김승호 회장. 해외 제약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한국 대표 의약품으로 키워낸 용각산, 겔포스부터 국내 제약사가 직접 개발한 신약 가운데 최대 매출을 올리는 고혈압 치료제 카나브까지 그가 보령의 회장으로서 걸어온 길은 제약산업의 역사 자체였다.

올해로 92세. 지금도 인류가 암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날을 꿈꾼다는 김 회장은 보령약국에서 고객의 건강을 살피던 청년시절의 간절함을 여전히 놓지 않는다. 또 다른 간절함도 생겼다고 한다. 김 회장은 회사 창립 62주년을 맞아 보령의 핵심 생산설비와 보령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은 예산캠퍼스에 62살 된 느티나무를 심었다. 이제 2세대를 넘어 3세대 경영인 시대로 전환하는 한국 제약업계가 1000년을 사는 느티나무처럼 국민과 인류의 건강을 지키며 함께 성장하길 바라는 1세대 경영인의 간절함을 담았다. 다음은 김 회장과의 일문일답.

-고향 이름인 '보령'을 따 사명을 지으셨습니다. '보령'은 회장님께 어떤 의미인지요?
▶지킬 보(保)' 자에 '편안한 령(寧)' 자를 쓴 보령은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제약업의 본질이 담겨있는 단어입니다. 제가 보령에 태어난 것은 '필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동안 사람들을 지키는 약을 만들어 살아왔으니 보령은 제게 '전부'인 것이지요. 60년 넘게 보령이라는 이름을 빌려 쓰고 있으니, 보령 시민 여러분께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회사가 점차 발전하면서 더러 보령 출신 분들이 "보령을 널리 알려줘서 고맙다"고 해주시는데, 그분들을 생각해서라도 허투루 회사를 운영해선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업초기 보령약국의 모습. 김승호 보령 회장은 한국전쟁 직후 집을 팔아 마련한 돈 300만환(현재 기준 4000만원)으로 종로 5가에 세를 얻어 보령약국을 개업했다. 오늘날 한국 대표 제약기업 보령의 뿌리다./사진제공=보령
-회고록 '기억이 길이 되다'에서 '청년 김승호'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보령의 철학이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공존공영', '성실', '신뢰'라는 세가지 철학이 지금껏 보령을 이끌어왔다고 생각합니다. 1957년 창업 당시부터 지금까지 더불어 잘 살고자 하는 '공존공영'의 정신은 저의 사명(使命)이자, 보령의 창업정신, 기업철학입니다. 저는 보령의 역사가 인간 존중의 역사로 기록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나아가 생명을 살리는 정신, 인간 존중의 정신이 바로 보령의 창업 철학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또한 '성실과 신뢰' 역시 공존공영을 가능케 하는 또다른 보령의 철학입니다.

-청년 김승호는 어떤 경험을 통해 보령의 철학을 만들었는지요?

▶보령의 철학은 유년시절 형의 약방을 지켰던 경험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됐습니다. 어릴 적 형이 약방을 했는데, 학교가 끝나면 산길을 따라 10리를 걸어 형이 운영하는 '대창약방'에 가서 가게를 지켰습니다. 당시 좋은 약이 많이 없었고, 약 자체도 부족해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제 때 약을 복용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의 건강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키웠습니다. 이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약국을 경영하며 성실과 신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경험했습니다. 가장 일찍 문을 열고 가장 늦게 문을 닫았습니다. 손님이 원하는 약이라면 자전거를 타고 온 시내를 돌아 다녀서라도 반드시 구해 놓았습니다. 보령약국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손님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습니다. 훗날 종로 5가와 6가 사이 약국거리가 생기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성실이 신뢰를 낳고 신뢰가 다시 신뢰를 낳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김승호 보령 회장은 1966년 당시 이미 세계적 제약기업이던 일본 류카쿠산을 설득해 기술제휴 계약을 맺고 용각산을 발매했다. 용각산은 지금도 한국을 대표하는 진해거담제로 사랑받고 있다./사진제공=보령
- 오랜 기간 고객에게 사랑받고 널리 쓰이는 약을 연이어 내놓을 수 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요. 약에 대한 철학을 듣고 싶습니다.
▶'약(藥)'은 '즐거울 락(樂)'위에 '풀 초(?)'가 얹혀진 형태의 한자어입니다. 우리 조상은 자연에서 각종 약재를 구해 병을 치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약을 통해 건강을 되찾고, 즐거움과 행복감을 얻었기에 약에 '락(樂)' 자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보령은 이렇듯 행복을 줄 수 있는 약품 개발에 매진해왔고, 감사하게도 오랜 기간 사랑받았습니다. 비결은 성실함에 있습니다. 오로지 '성실' 하나 믿고 진해거담제 용각산을 출시하기 위해 원 개발사인 일본 '류카쿠산'을 설득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당시 보령의 성수동 공장이 착공도 못한 시점, 이미 세계적 기업 반열에 오른 류카쿠산과 기술제휴를 위해 매일 우체국에 가서 담당 중역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안 받으면 비서에게 '한국에서 용각산을 만들 보령제약 김승호 사장'이라고 계속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성실함으로 무장한 끊임없는 설득 끝에 1966년 12월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겔포스 역시 성실이 빚어낸 선물 같은 제품입니다. 겔포스의 원 개발사인 프랑스 '비오테락스'와 약 1년간 교섭한 끝에 1972년 기술제휴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보령의 역사는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도전은 무엇이었는지요?
▶국내 최초이자 세계 8번째 고혈압 신약인 '카나브'를 개발한 일입니다. 제약업을 시작하면서 '내 손으로 신약 하나는 꼭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수입약이나 제네릭(복제약)에 의존하고 있던 우리 제약산업 현실 속에서 우리 신약을 팔고 싶다는 꿈을 꾼 것이죠. 쉽지 않은 도전이었습니다. 신약 개발은 후보물질 발굴에서 3단계 임상시험을 거쳐 시판에 성공할 확률이 만분의 일 정도에 불과합니다. 1만 2000여 종의 유도체를 하나하나 검색해 그 중 500여 종의 신물질을 찾아내고 독성시험과 약효검증을 위한 수많은 연구를 거쳐 마침내 최종 후보물질을 도출하는 과정은 매일매일이 도전이었습니다. 카나브를 알리기 위해 제 명함에 '카나브 PM(Product Manager)'이라는 직책을 넣고 열심히 마케팅을 했던 기억도 새삼 떠오릅니다. 현재 카나브는 국산신약 가운데 가장 많은 처방매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카나브는 중남미, 동남아 등 세계 각지에 진출하며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수출에서 발매, 처방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신약의 전주기를 거치며 '신약 수출의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보령은 2011년 3월 2일 500여명의 영업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고혈압 신약 '카나브' 발매식을 가졌다. 국내 최초이자 세계 8번째 고혈압 신약 카나브 개발은 김승호 회장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도전이었다./사진제공=보령
-한국 제약산업의 현주소와 나아가야 할 길은 어디인지 듣고 싶습니다.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신약개발, 기술수출, 대규모 위탁생산 수주 등 세계가 주목할만한 성과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이 우리 제약·바이오 산업이 퀀텀점프를 할 수 있는 중차대한 기회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제약사들이 해외로 눈을 돌려 글로벌 신약을 만들어 내겠다는 도전을 거침없이 이어갔으면 합니다. 우리만의 기술로 해외시장에서 골리앗 같은 글로벌 기업들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장면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 정부와 사회에서도 글로벌 신약 육성을 위한 정책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펼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기업들이 새로운 사업기회를 모색하는 일에도 더욱 힘써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지금은 융복합의 시대입니다. 기존의 기술들이 만나서 새로운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제약업을 넓게 보면 '인간의 건강에 관한 일체의 사업'이라고 볼 수 있는 만큼, 시너지가 날 수 있는 유관 분야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나서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됩니다.
보령약국 시절 우리나라 최초로 매장 내 설치한 '오픈 진열대' 모습. 고객과 약사의 시선이 함께 닿는 곳에서 약을 주니 고객들의 신뢰가 커졌다고 한다./사진제공=보령
-이제 제약업계에서도 2세대, 3세대 경영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 경영인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지요?
▶제가 가장 아끼는 말 중 하나가 '혁신'입니다. 지금의 보령이 있기까지 핵심 원동력은 '혁신'이었습니다. 약국을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매장 내 '약품 진열대'를 설치한 일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고객과 약사의 시선이 함께 닿는 곳에서 약을 주니 고객들도 호감과 신뢰를 보였습니다. 한눈에 펼쳐진 진열대에서 잘 정돈된 약을 구입하는 그 기분은, 자신이나 가족이 복용할 약품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습니다. 지금이야 모든 약국이 다 진열대 방식을 활용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렇게 약을 진열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전표제'를 도입한 것도 혁신의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물건이 판매될 때마다 품목과 수량, 가격을 그때그때 전표에 기입해 확인해 두는 방식이었습니다. 전표제는 약국 경영을 질적으로 발전시킨 시스템이었습니다. 주문에서 처방, 판매까지 시간이 적게 들고 효율도 높아졌습니다. 이처럼 혁신은 나 자신뿐 아니라 주변사람까지 행복하게 만듭니다. 이 점을 후배 경영인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두번째로 후배 경영인들에게 기업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기업은 그저 돈만 버는 곳이 아닙니다. 기업이 어디서 생기며 누구에 의해 유지되며 그 상당 부분은 누구의 것입니까? 바로 기업에서 물건을 사고 그 주식을 사고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기업이 사회에 기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창업 60주년 행사장에서의 김승호 보령 회장(좌측)과 창업 62주년을 맞아 예산캠퍼스에 심은 62살된 느티나무(우측)/사진제공=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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