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통화로서 '킹달러'의 위상이 전 같지 않다. '석유는 반드시 달러로 사야 한다'는 페트로 달러 체제가 무너질 조짐이다. 페트로 달러 체제란 사우디와 OPEC(석유수출국기구)이 석유거래를 달러로만 하는 대신 그 대가로 사우드 왕가가 미국으로부터 안보 우산을 제공받는 밀약이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이 협약으로 미국은 달러 패권을 공고히 해왔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지난해 2월 국제 은행 결제망에서 러시아를 퇴출시킨 이후 오히려 달러 의존도를 줄이려는 '탈달러화'(de-dollarisation)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이 관리하는 외환보유액에서 달러 비중이 줄고 국제 교역에서 달러를 이용한 결제도 감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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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재가 부른 '비동맹의 결집'…"달러 비중 낮추자"━
통상 중앙은행은 경제위기 시 환율을 지지할 필요가 있을 때를 대비해 비축자금을 달러로 보유한다. 통화가 달러보다 지나치게 약세를 보이면 미국 통화로 거래되는 석유 및 기타 상품이 비싸져 생활비가 상승하고 인플레이션이 촉진된다. 홍콩 달러에서 파나마 발보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통화가 이 같은 이유로 달러에 고정돼있다.
이런 가운데 탈달러화는 중국에는 위안화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전 세계 역외 외환거래에서 위안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15년 전 거의 '제로'(0)에서 7%로 증가했다. 남미에서는 브라질 룰라 대통령이 달러 의존도를 줄이자고 제안하자 다른 국가도 호응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달러를 대체해 위안화 사용 방침을 천명했고 볼리비아와 우루과이도 합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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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의 지위는 美국채 시장에서 나와"…대체재 없다━
또 은행예금이 항상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업들은 현금 대체 수단으로 국채를 사용하는데, 23조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시장은 안전한 자금의 피난처로 여겨져 달러 지위를 뒷받침하고 있다. 국가 간 통화 흐름을 추적하는 미국외교협회 연구원 브래드 세서는 "국채 시장의 깊이, 유동성, 안전성은 달러가 주요 기축통화인 큰 이유"라고 밝혔다.
미 국채를 대신할 만한 대안은 아직 없다. 독일의 채권 시장은 2조 달러 규모에 그친다. 기업들이 중국과 위안화로 거래할 수는 있어도 계좌개설의 어려움이나 규제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거래 대금을 중국 국채로 재활용하긴 어렵다. 냇웨스트마켓의 신흥시장전략가 갤빈 치아는 이에 반해 "미 국채는 앱만 있으면 어디서든 거래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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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달러화 아닌 다극 체제로 자산 재편 가능성도━
브라질과 공동 통화 발행까지 준비한다는 아르헨티나에선 유력 대선후보가 "달러화를 국가통화로 채택하자"(하비에르 밀레이)고 제안하며 탈달러화 움직임을 무색하게 했다. 자국 통화(페소)를 없애는 대신 달러를 국가통화로 채택하는 방안을 살인적 인플레이션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
단 하나의 화폐가 달러의 후계자가 될 순 없더라도 대안이 많아지면 다극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없진 않다. 실제 글로벌 중앙은행들은 다른 통화, 회사채, 부동산 같은 유형자산 등 다양한 자산을 대안으로 검토하고 있다. 토스카펀드 홍콩의 상무이사 마크 팅커는 "이것이 바로 현재 진행 중인 과정"이라며 "(이런 맥락에서) 글로벌 시스템에서 달러의 사용은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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