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 무렵 마다가스카르는 카리브해 해적들이 막 호황을 누리던 인도양 해로를 약탈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필수적인 경유지가 되었다. 이 섬 북동부 해안의 한적한 항구에 해적들은 암보나볼라, 생트마리 같은 타운을 세웠다. 항상 뜨내기 거주자가 수천 명이나 있었지만 제대로 된 정부 같은 것은 없었던 이 정착지 타운은 서인도 제도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수많은 섬으로 이뤄진 비공식 해적질 인프라의 한 부분이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유작인 <해적 계몽주의>에 따르면, 이 섬들은 정치적 상상력과 자유의 온상이기도 했다. 해적과 마다가스카르 현지인 간의 만남은 비즈니스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파리(루소)와 쾨니히스베르크(칸트)에서 수만 리 떨어진 이 곳에서 급진적인 형태의 민주적 통치와 "계몽주의 정치사상의 여명" 같은 것이 나타나기도 했다.
2020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레이버는 인류학자이자 사회 이론가로서 최고 수준의 학자였다. 또한 자신이 혐오했던 불평등과 권위에 대한 반대라는 대의를 (월스트리트 등에 대한) '점거'(Occupy) 운동에서 발견한 격렬한 반세계화 운동가이기도 했다. 이 <해적 계몽주의> 역시 그러한 반항심에서 출발했다.
이 책은 18세기 마다가스카르에서 대담한 민주주의 실험이 꽃을 피웠다고 주장하면서, 유럽인들이 유럽밖의 도움 없이 어떻게 유럽 땅 위에 민주주의를 재창조하고 근대 세계를 최초로 최고로 건설했는지에 대한 매일 들려오는 뻔한 이야기들을 해체해버린다.
바나비 슬러시는 18세기에 접어들 무렵 HMS 라임 호에서 근무한 영국 왕립해군 요리사였다. 그는 1709년 영국 독자들에게 놀라움과 심적 동요를 안겨주며 "해적들"은 같이 배를 타고 있는 동료들끼리 "군왕"처럼 당당하게 행동한다고 설명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서로를 민주적으로 동등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슬러시는 해적은 "모든 면에서 무지막지한 강도들"이지만 "자기들끼리는 정의롭다"고 말했다. "다른 모든 시도에는 대담함을 보이는" 무자비한 해적선장조차 해적선원들이 지켜온 "평등의 법도"를 감히 침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에서 악명 높은 해적 플린트 선장이 등장하면서부터 해적선은 대중의 상상 속에서 바다위의 독재체재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해적을 폄훼하려는 정치적 선전에 가깝다.
사실 바다위의 독재체제는 해적선이 아니라 대영제국 해군함정이었다. 영국 해군함정에서는 수병에 대한 규율이 자의적으로 잔인했고 장교들이 노동계급 출신 수병들에게 폭군처럼 행동했다. 많은 해적들이 전직 수병들이었다. 이런 독재에 맞서 목숨을 걸고 반란을 일으켰던 그들이었기에 똑같은 독재체제를 재현하는 것을 혐오했다. 어차피 사형 선고를 받은 해적들에게 자유는 남은 시간 동안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이었다.
역사학자 마커스 레디커는 해적들이 의도적으로 "주인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고, 이에 따라 스스로를 통치했다고 주장했다. 해적선장은 전투가 치열하거나 추격전이 벌어질 때 명령을 내릴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권한이 제한적이었다. 다수결로 선출된 해적선장은 마찬가지로 같은 절차로 해임될 수 있었다. 해적선장은 다른 모든 선원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선원들 전체모임과 소수 회의체에 참여했다.
또한 배의 자원을 배분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선원들을 대변하는 갑판장과 권한을 나눴다. 18세기의 한 관찰자는 갑판장의 역할을 "로마의 호민관을 모방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관찰자는 갑판장을 배의 총리로 보았다. 해적선은 선장과 갑판장 외에는 계급이 나뉘어 있지 않았다.
그레이버는 이 '거칠지만 이미 완성된 평등주의'가 마다가스카르에 상륙한 것은 1690년대였다고 말한다. 해적들은 반영구적인 전초 기지를 세우고 바다에서 실천했던 집단주의 정신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 평등의 전초기지를 세운 사람들은 예상할 수 있듯이 '어둠의 사람들'이었다.
벳시미사라카 연방은 약 700킬로미터의 해안선을 지배하며 1710년대에 탄생한 거대한 마다가스카르의 국가다. 당시 영국인 해적과 마다가스카르인 어머니의 아들로 추정되는 라시밀라호가 건국 왕이었다. 그레이버는 벳시미사라카가 근본적으로 분권화되고 심지어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민주적' 사회 질서를 감추기 위해 힘없는 허수아비 군주를 앞에 내세운 대안적인 정치체제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해적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및 토론이라는 지역적 전통을 결합할 수 있었던 상상력이 풍부한 "원시 계몽주의적 정치실험"으로 이 벳시미사라카 연방을 보길 요청한다.
벳시미사라카 연방 시대 마다가스카르 의사 결정의 중심에는 지역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남성과 여성이 합의를 모색하는 오래된 회의체인 카바리가 있었다. 카바리는 마을 내에서, 씨족 간에, 심지어 지역적으로도 개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격식 차리지 않고 활발한 토론을 선호하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할 때, 카바리는 마다가스카르 사회가 유럽인들이 유럽 계몽주의의 원동력으로 자주 주장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자유분방하고 수평적인 사회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고 그레이버는 생각한다. 이러한 마다가스카르의 전통이 대화와 상업적 교류를 통해 '해적 평등주의'와 만나면서 벳시미사라카 연방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레이버가 해적과 마다가스카르 지역 지도자들에 대해 글을 쓴 것은 단순히 그들을 비난에서 구출하거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룬 업적을 기리고 그들의 창의적인 장난과 활기찬 정신을 즐기며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자유로워지도록 돕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해적 계몽주의>의 진정한 보물이자 지적 유산이다.
그레이버는 인간의 삶을 그 생명력의 중심에 초점을 맞춰 조명하는 역사서술 방식에서 힘과 세상을 바꾸는 힘을 발견했다. 그 생명력의 중심은 무질서하고 놀랍고 지저분하고 야만적이며 언제나, 언제나 재미있다.
━
PADO 웹사이트에서 해당 기사의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국제시사·문예 매거진 PADO는 통찰과 깊이가 담긴 롱리드(long read) 스토리와 문예 작품으로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을 자극하고, 급변하는 세상의 조망을 돕는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합니다.━
[저작권자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