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이 기후변화보다 심각하다[광화문]

머니투데이 양영권 사회부장 | 2023.05.02 04:30
1980년 9월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지미의 세계(JIMMY'S WORLD)'라는 제목의 기사로 미국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기사는 지미라는 이름의 8살짜리 어린 마약 중독자에 대한 내용이었다. 기사를 쓴 재닛 쿡은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사회는 다시 한번 경악했다. 퓰리처상 수상 며칠 뒤 기사 내용이 허위로 밝혀진 것이다. 마약중독 소년 지미는 없었고 기사 내용은 순전히 소설이었다. 쿡은 퓰리처상을 반납하고 회사를 떠났다.

마약이 흔하다는 미국에서도 소년 마약은 충격적이다. 특종에 눈먼 사이비 기자가 자기 이름을 알리는 가짜기사 소재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소설이라고 믿고 싶은 소년 마약 사건이 최근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고 있다.

지난달 서울 동대문구에서는 남녀 중학생 3명이 함께 필로폰을 집에서 투약한 게 적발됐다. 학생의 나이는 14세였다. 경찰에 따르면 이 아이들은 마약을 구매하는 데 텔레그램을 이용했다. 마약 판매상은 암호화폐를 받고 이른바 '던지기 수법'으로 아이들에게 마약을 건넸다. 아이들은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는 "호기심에 그랬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16살 미성년자가 SNS와 랜덤채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마약을 접한 뒤 동네친구, 학교친구 등에게 권유해 중독시킨 사실이 지난달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브리핑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미성년 마약 사범은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잡힌 마약 사범 1만8395명 가운데 19세 이하는 481명으로 전체의 2.6%를 차지했다. 5년 전인 2017년 119 명의 4배가 넘는다. 작년 마약사범을 15세 미만으로 범위를 좁히면 41명이었다. 또 대법원이 이종배 의원실에 제출한 마약류 관리법 위반 등 마약류 사범 통계에 따르면 10세 이상 14세 미만의 나이인 '촉법소년' 처리 건 수는 지난해 21 건이었다. 촉법소년 처리는 2018년부터 2021년까지 모두 합해 3건에 불과했는데 지난해 폭발적으로 는 것이다.

'말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정도면 조만간 우리 신문에 '지미의 세계'와 같은 기사가 가짜뉴스가 아닌 실제 사건으로 등장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미 마약은 위험 부담 없이 누구나 구할 수 있는 존재가 돼버렸다. SNS 등 익명으로 거래할 수 있는 통로는 넓어지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제조법으로 만들 수 있는 신종 마약까지 속속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막을 인프라 구축을 게을리한 결과다. '대치동 마약 음료' 사건은 도처에 마약이 뿌리내려 있고, 다른 범죄와 쉽게 결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약이 흔해진 세상에서 마약에 대한 호기심은 파멸의 충분조건이다. 마약사범 3명 가운데 1명은 다시 마약에 손을 대다가 붙잡힐 정도로 재범률이 높다. 한번 발을 내디디면 빠져나오기 어렵다. 그만큼 소년기에 마약을 접할 경우 개인과 사회의 해악은 커진다. 마약은 인간의 미래를 파괴한다.

우리 사회에 닥친 문제 가운데 저출산이 심각하다고 하지만 아이 한 명을 태어나게 하는 것보다 태어난 아이를 잃지 않고 제대로 키우는 게 더 중요한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또 마약은 그 확산 속도만 보자면 기후변화보다 심각한 문제다. 마약은 미세먼지보다 해롭다. 하지만 미세먼지 저감을 위해 매년 1조원 넘게 쓰면서 검찰 마약 수사 예산은 44억원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게 현실이다.

마약 퇴치를 놓고는 지역감정도 없어야 하고, 젠더·이념 갈등도 없어야 한다. 정쟁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 마약 수사는 물론 마약의 해악을 알리는 교육을 강화하고 치료·재활 시설을 확충하는 데 여와 야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게 우리의 미래가 붕괴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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