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축의 이동, 판의 재편(2)

머니투데이 강기택 산업1부장 | 2023.04.24 04:06
'먹고산다'는 표현에서 보듯 먹는 일은 '삶'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먹는 일, 먹이는 일에 실패하면 재스민혁명처럼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 식량확보를 위해 전쟁을 불사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밥그릇'을 지키는 것은 늘 으뜸 국정사안이다.

첨단기술로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는 시대의 먹거리는 식량만이 아니다. 반도체는 특히 글로벌 밥그릇 싸움이 한창인 전장이다. 미국, 유럽연합(EU)이 반도체를 자국 산업화하려고 법을 만들고 지원에 나섰다. 중국의 반도체굴기 시도는 멈춤이 없다. 일본도 반도체산업 부활을 꾀한다. 반도체 중심축의 이동을 놓고 '각축전'이 거세다.

이는 단순히 기술영역의 주도권 다툼이 아니다. 경제와 군사 등 모든 방면에서 국제질서의 패권을 두고 벌어지는 헤게모니 쟁탈의 일환이다. "국가안보를 위해 반도체 등 첨단기술에서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발언이나 "중국과 관계에서 경제보다 안보를 고려할 것"이라는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의 언급은 허투루 한 것이 아니다.

이 '리얼게임'에서 지는 쪽은 속국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이 같은 지정학적 맥락에서 미국은 이미 도널드 트럼프 정부 시절 화웨이, ZTE 등 중국 기업을 제재했다. 그 연장선에서 조 바이든 정부는 일본, 네덜란드 등 동맹국과 합세해 중국 첨단기술의 싹을 자르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반도체·AI(인공지능) 등에 대한 대중 투자금지 행정명령도 준비 중이다.

첨단기술에 대한 미국의 국익추구 행보는 1980년대에도 존재했다. 미국은 1986년 일본 내 외국산 반도체 점유비중을 20%까지 높이는 '미일 반도체협정'을 관철했다. 당시 동맹국인 일본을 견제했다면 지금은 적성국인 중국의 추격을 원천봉쇄한다는 게 다를 뿐이다. 미국은 지난해 8월 공포한 반도체육성법(CHIPS and Science Act)을 통해 다시 반도체 생산의 중심축이 되려는 의도를 구현하려고 한다. 최대 25%의 투자세액공제를 주고 520억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주는 게 이 법의 골자다.


미국에 투자를 확대하려는 한국 기업 입장에서 보면 법의 독소조항이 적지 않다. 반도체 생산시설에 국방부 등 국가안보기관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과 재무, 영업, 회계자료를 제공토록 한 것은 기술과 영업비밀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 초과이익 공유, 군사용 반도체 우선 공급 등 다른 조건도 까다롭다. 미국의 보조금을 받으면 앞으로 10년간 중국 내 반도체 생산을 5%까지만 증산할 수 있다는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도 불편하다. 삼성전자 시안공장(낸드플래시), SK하이닉스 우시공장(D램)의 생산능력이 제한된다.

이런 까닭에 보조금 신청을 놓고 딜레마에 빠졌다. 문제는 이것이 기업의 투자나 매출, 이익 등에 국한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은 2003년부터 한국의 최대 수출국이었다. 반도체가 수출을 견인했고 반도체의 중국 수출비중은 40%에 달한다. 이렇게 반도체를 팔아 벌어들인 달러로 석유도 사고 곡물도 산다. 생존의 젖줄인 셈이다. 그런데 반도체 수출이 9개월째 뒷걸음질하는 중이고 그로 인한 무역수지 적자는 환율과 물가, 성장에 영향을 미쳐왔다.

국제관계에서 힘과 힘이 충돌하면 약자의 등은 터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 동맹과 파트너 국가의 안보이익을 먼저 고려한다고 하지만 밥그릇에 관한 한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국가의 논리가, 동맹보다는 자국의 이익이 우선하는 게 룰이다. 오는 2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정부는 경제·안보협력을 보다 구체화할 것이며 반도체·배터리·퀀텀 같은 핵심 신흥기술 분야 파트너십 등을 다룰 것이라고 한다. 반도체 보조금 요건 완화도 당연히 논의할 것이다. 서로 이익이 부합하는 지점을 찾아 밥그릇을 잘 간수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살기 위해 먹는 일만큼 숭고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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