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 정리해" 한마디에 아파트 뚝딱..4개월만에 '우르르'[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구경민 기자 | 2023.04.08 06:00

편집자주 |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70년 4월 8일.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 당시 모습.

지금으로부터 53년전인 1970년 4월 8일.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자락에 있던 와우시민아파트가 무너지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대한민국 3대 붕괴사고로 꼽힌다.

이번 사고로 70여명이 매몰당했고 입주민 33명과 잔해에 깔린 판자집 주민 1명이 사망했다. 또 40명이 부상당하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준공 4개월 만에 일어난 이 사고는 졸속행정과 부실시공이 원인이었다.



판자촌 난립에 무허가 건축물 정리..부실공사로 붕괴


1960년대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들던 시기다. 갑자기 급팽창한 서울에는 판자촌으로 대표되는 무허가 건축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에게 "판자촌을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박 대통령의 충복이자 '불도저 시장'으로 통했던 김 시장은 바로 무허가 건축물을 정리 하라고 지시했다. 각 구청들은 판자촌 등 무허가 건축물의 현황을 파악한 후 대부분을 철거하고 시민아파트들을 짓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건설된 것이 바로 이 와우 아파트였다.

대부분의 시민 아파트는 판자촌을 밀어내고 건설을 하다보니 대부분 산 가장 자리에 위치했다. 와우 아파트 위치는 현 홍대거리 뒷산인 와우산 자락에 있었다. 하지만 부실공사가 문제를 낳았다. 당시 서울시는 말도 안되는 수준의 단가에 입찰하게 하고 거부하면 이후 관급공사에서 불이익을 줬다. 그러는 바람에 건설사 측에서는 원가 책정을 턱없이 낮췄고 당시 중간에서 업체들과 공무원들이 떼먹는 경우가 빈번했다.

와우 아파트는 5층 규모 총 19동이 지어졌다. 이 중 13동에서 16동까지를 대룡건설이 담당했는데 대룡건설은 무면허 토건업자에게 하도급을 줬다.

문제는 단지 하나를 만드는 데에 겨우 6개월 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날림 공사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예산을 무조건 "싸게하라"는 조건으로 하도급을 줬기 때문에 싼값에 억지 공사를 하게 됐고 이름 없는 불성실한 업자들까지 끼어들게 됐다.

그러니 당연히 공사가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었다. 철근 개수를 10분의 1 이하로 넣었고 콘크리트도, 시멘트 함량도 한참 모자라게 불순물을 넣어서 만들었다.

와우 아파트는 1969년 12월 26일에 완공돼 입주가 시작됐는데, 그때부터 이미 문제의 업자가 시공한 13~16동에는 금이 간 채였다고 한다. 특히 14동은 콘크리트 받침 기둥이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붕괴시점에는 주민이 대피한 상태였다.

튼튼한 암반이 아닌 물렁한 부토 위에 아파트 기둥이 세워졌고 그나마 겨울에는 땅이 얼었기 때문에 겨우 버틸 수 있었다. 봄이 되고 땅이 녹자 결국 기둥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준공 4개월만에 무너졌다.


그나마 30세대 입주 예정이었으나 절반밖에 입주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사망자가 적었다.



두부 수준의 재료 '기막혀'..서울시장 경질


이 사고로 '불도저 시장' 김현옥 서울시장은 사임했다. 사실상 경질이었다. 문제의 하청업자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이외에도 3명이 징역을 선고받았다.

붕괴 직후 서독의 건축 전공 대학원생들이 사고 원인을 분석하려고 시도하다가 난색을 띠고는 귀국했다. 그 이유가 아파트는 커녕 헛간을 짓기조차도 턱없이 부족한 자재로 어떻게 아파트를 지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고 한다.

건축공학적인 분석과 규명을 하러 왔더니 집을 짓는 재료가 완전히 '두부 수준'의 재료였다는 결론이 나와 황당함과 기막힘에 치를 떨고 돌아갔다고.

15동 붕괴가 일어난 후 문제의 시공업자가 시공한 13, 14, 16동도 철거됐다. 콘크리트 질이 너무 떨어져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상당히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이라 철거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은 급하게 안전도를 검사했다. 이 중 무려 80%인 349개동이 보수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쓸 만한 아파트는 계속 보수해서 쓰고 못 쓸 정도가 된 아파트는 하나씩 철거했다.

이후에 판자촌을 밀고 이들에게 시민 아파트를 준다는 계획에서 중산층을 목표로한 재개발로 재개발 방향이 수정됐다.

이 사고 탓에 아파트를 불신하는 감정이 팽배해지자 박정희 정부는 시범아파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중산층을 겨냥한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를 짓기로 했다. 더 높고 더 쾌적하고 안전한 아파트를 목표한 것. 이에 여의도를 시작으로 시범 아파트들이 성공했다고 할 만하게 세워졌고 이것이 지금의 아파트의 전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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