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의 아포리아]카터 대통령의 삶과 인권외교

머니투데이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2023.03.09 02:03
김남국 교수
[편집자주] 아포리아는 그리스어의 부정 접두사 아(α)와 길을 뜻하는 포리아(ποροσ)가 합쳐져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 또는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여 진실을 규명하기 어려운 난제를 뜻하는 용어. '김남국의 아포리아'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지구적 맥락과 역사적 흐름을 고려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대안을 모색한다.


최근 미국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발표했다. 올해 98세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제39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그는 가장 성공적으로 퇴임 이후 시간을 보낸 대통령으로 평가되며 애초부터 전직 대통령이었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는 퇴임 뒤 세운 카터센터를 통해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 인권증진과 분쟁해결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카터 전대통령은 지난해 법원에 제출한 한 문서에서 자신을 농부이자 해군 장교, 주일학교 교사, 야외활동을 좋아하는 사람, 민주주의 활동가, 사랑의 집짓기 건축가, 조지아 주지사, 노벨평화상 수상자, 그리고 39대 미국 대통령이었다고 소개했다. 다양한 그의 이력에서 보듯 그의 인생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재직한 4년은 짧은 부분이었고 나머지 많은 활동에서 그는 자신이 이루고자 한 삶의 가치를 위해 부단히 움직인 겸손하고 강인한 인물이었다.

그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일상이던 미국 남부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친절하고 인정 많으면서도 인종차별만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이를 입증하는 성경구절을 줄줄 외우곤 하는 백인 어른들을 보면서 자랐다. 흑인과 백인 사이의 평등문제나 흑인들의 처지에 대해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던 그는 함께 놀던 흑인 친구들이 목초지 문을 먼저 통과하라고 자신에게 양보하는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박해에 눈감기 일쑤인 현실에서 그는 서서히 차별철폐운동에 참여하고 그것이 가져온 정치·사회적 변화를 목격하면서 미국이 인권과 자유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신념에 이르게 된다. 카터는 미국이 도덕적, 철학적 원칙에 헌신해온 국가며 따라서 미국의 도덕적 이상주의는 외교문제에 대한 현실적 접근 원칙이자 미국의 힘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근거라며 인권외교를 자신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한국을 향해서도 긴급조치9호 폐지와 정치범 석방 등을 요구했고 동시에 주한미군 철수를 내세웠다. 그는 자서전에서 미군이 철수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2가지 실마리를 제시했다. 우선 그는 한국이 충분히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스스로 방어 가능한 능력이 있다고 봤다. 더 구조적으로 그는 군축을 통해 소련과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군사적 봉쇄와 미국 중심의 반공국가 동맹이라는 기존 이분법적 외교원칙에서 벗어나 자유와 인권에 기초한 세계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군사적 대결에 의한 힘의 균형보다 사회·경제적 영향력에 의한 상호의존적 세계질서가 등장할 것이라고 믿고 이를 위해 인권신장과 미국의 지원을 연계해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한 그의 정책은 따라서 선구적인 탈냉전적 접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12·12 군사쿠데타에는 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1979년 11월 이란에서 발생한 미국대사관 인질사건의 충격으로 우방국가에서 유사한 혼란의 발생을 우려한 점, 그리고 안보이해를 우선하는 전통적 냉전세력이 재등장해 인권외교를 견제하는 상황이 있었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카터 외교정책의 중요한 자산이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식 신념이 모든 현실에서 반드시 긍정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은 오사마 빈라덴을 지원하는 탈레반을 제거하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이는 애초부터 실패 가능성이 높았던 친미정부 수립을 통한 국가 건설과정 개입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간 3000여명에 가까운 미군 사망자를 내며 자신들이 믿는 민주주의 확산에 국력을 소모하는 사이 중국은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면서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경쟁세력으로 부상했다.

베스트 클릭

  1. 1 "몸값 124조? 우리가 사줄게"…'반도체 제왕', 어쩌다 인수 매물이 됐나
  2. 2 [단독]울산 연금 92만원 받는데 진도는 43만원…지역별 불균형 심해
  3. 3 점점 사라지는 가을?…"동남아 온 듯" 더운 9월, 내년에도 푹푹 찐다
  4. 4 "주가 미지근? 지금 사두면 올라요"…증권가 '콕' 집은 종목들
  5. 5 '악마의 편집?'…노홍철 비즈니스석 교환 사건 자세히 뜯어보니[팩트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