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역사로 보는 미국의 반도체 경쟁 패배 원인[PADO]

머니투데이 김수빈 PADO 매니징 에디터 | 2023.02.26 08:00

편집자주 | 미국이 자국의 첨단 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면서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에도 많은 관심이 쏠립니다. 그중에서도 한국 기업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반도체 부문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반도체는 고도로 자본집약적인 산업이고 이미 대만과 한국이 상당한 격차를 만들어 놓은 상태라 제아무리 미국이라도 성공을 장담하긴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산업 구조가 첨단 기술 개발에는 강하지만 실제 반도체 칩 생산에 필수적인 정밀 '제조업' 기반이 약해진 상태라는 게 문제입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이자 곧 국내에도 소개될 <반도체 전쟁>의 저자 크리스 밀러는 2022년 10월 18일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 기고문에서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하면서 미국 정부가 제조업 기반 다지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밀러의 기고문을 요약 소개합니다. PADO는 앞으로도 세계 반도체 전쟁에 대한 심도 있는 기사를 계속 소개하겠습니다.

(워싱턴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반도체· 희토류 ·배터리 등 핵심 품목의 공급망을 확보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을 하기 전에 반도체 칩을 들고 연설을 하고 있다. (C) AFP=뉴스1

미국 정부는 2022년 8월 공포한 '반도체 및 과학법'에 따라 자국 반도체 산업의 부흥을 위해 520억 달러를 투입한다. 반도체를 발명한 곳은 미국이고 반도체의 디자인과 생산 공정에 여전히 미국산 소프트웨어와 장비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대부분은 주로 동아시아에서 생산된다. 그러나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게다가 미국 정부는 중국의 첨단 컴퓨터 기술 확보를 막기 위해 대대적인 규제를 펼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생산 능력의 향상이 국가안보 차원에서도 중요한 과제가 됐다. 최첨단 기술이 들어간 프로세서는 미국에서 전혀 생산할 수 없다(주로 대만에서 생산된다)는 사실은 상황을 보다 심각하게 만든다.

반도체 및 과학법이 인지하고 있듯 미국의 반도체 생산 능력을 재건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세계 최대의 프로세서 칩 생산업체인 TSMC, 삼성, 인텔 모두 미국에 새로운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지을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돈을 투입하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핵심을 해결할 수 없다. IT산업의 중심지인 실리콘밸리와 정치의 중심지 워싱턴의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반도체 칩 제조업체와 그 핵심 협력업체를 비롯한 첨단제조업 기업들이 겪고 있는 난관을 우선적으로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실리콘밸리는 그간 앱과 인터넷에만 집중한 나머지 제조업 기반을 많이 잃었다. 워싱턴은 소비자 IT 대기업에만 집착해 모든 컴퓨터 기술이 의존하는 하드웨어 부문은 등한시했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부흥시키려면 실리콘밸리의 초기 시절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미국의 반도체 기업이 외국의 강력한 경쟁자를 만나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을 느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 인텔 같은 미국의 선도적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부도 위기에 몰렸다. 인텔을 위기에서 구출한 건 CEO 앤드류 그로브였는데 그는 첨단기술에는 창조성과 혁신 뿐만 아니라 매우 효율적인 정밀제조업도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미국 정부가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살리려면 'IT 기업'의 정의부터 바꿔야 한다. 구글, 페이스북 등의 소비자 대상 소프트웨어 기업 뿐만 아니라 첨단제조업 기업도 IT 기업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헝가리 출신의 난민이었던 그로브는 인텔을 수십 년 간 이끌었는데 그는 제조업을 인텔의 핵심 정체성으로 여겼다. 1979년 인텔의 대표가 된 후, 그로브는 일본 경쟁사들의 맹공으로 부도 위기에 놓여있던 인텔을 구출했다. 10년 후, 지금까지 생산된 모든 컴퓨터의 절반 이상이 인텔의 칩을 사용하게 됐다. 인텔은 지금까지 총 250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냈다.

그로브가 처음 인텔의 대표가 됐을 당시 인텔의 핵심 사업은 기업용 대형 컴퓨터에 들어가는 메모리칩 판매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일본 기업이 업계에 진출해 미국 기업보다 적은 비용과 높은 수율로 칩을 생산하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로브는 인텔이 경쟁이 치열해지는 메모리칩을 버리고 첨단 마이크로프로세서 같은 고부가가치 상품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IBM은 새로 개발한 '퍼스널 컴퓨터(PC)'에 이런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하고 있었다.

인텔에게 메모리칩 시장을 떠난다는 건 마치 포드가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로브는 메모리칩 사업을 포기하면서 인텔의 인력 4분의 1을 감원하고 공장 여러 곳을 닫는 용단을 내렸다. 그로브는 구조조정과 함께 두 번째 전략으로 제조 수율 개선에 전력 투구했다. 그는 저서에서 자신의 철학에 대해 이렇게 썼다. "경쟁에 대한 두려움, 부도에 대한 두려움, 틀리는 데 대한 두려움, 패배에 대한 두려움 모두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하루 종일 일한 후에도 그로브로 하여금 서류더미를 들춰보고 부하 직원들과 통화하게 만든 것은, 납기가 연기됐다거나 불만이 있는 고객이 있다는 걸 놓쳤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로브가 부활시킨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의 인텔에서는 일과가 언제나 오전 8시에 칼같이 시작됐다. 자유분방한 실리콘밸리 문화 대신 신병 훈련소 같은 엄격한 규율이 자리잡았다. 그로브는 '정확한 복사(copy exactly)'라는 새로운 정책을 실시했는데 회사에서 최적의 제조 공정을 결정하면 엔지니어들에게 이를 가르쳐 모든 생산 시설에 그대로 복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해결책을 창안하는 대신 시키는대로 이행하라는 데 많은 직원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인텔의 공장이 연구소보다는 정밀하게 세팅된 기계처럼 움직이기 시작하자 생산성은 높아졌고 비용은 줄었다.

그러나 인텔이 1980년대 부활하게 된 것이 그로브의 혹독한 경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조공정의 최적화도 인텔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제조능력과 업계 최고 수준의 칩 설계를 결합시킨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인텔은 이를 '틱톡' 방식이라고 불렀는데 제조공정의 개선('틱')이 발생할 때마다 보다 효율적인 칩 설계('톡')를 정확히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제조, 소프트웨어, 시스템 설계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인텔은 30년간 PC 프로세서 시장에서 최고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다.


2005년 그로브가 떠나자 인텔은 다시 표류하기 시작했다. 전직 인텔 직원들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핵심 사업이었던 PC용 칩 생산이 오랫동안 많은 이익을 내면서 규율을 중시했던 사내 문화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다. 오랜 기간 발생한 이익이 사내에 퍼져있던 그로브적 집착을 약화시킨 것이다. 인텔에 오래 근무했던 이들은 해가 갈수록 재무 부서의 입김이 강해지고 화학, 물리학 엔지니어의 입김이 약해지면서 임원급에서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는 걸 볼 수 있었다 한다. 미국 첨단기술의 상징과도 같았던 기업이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했다. 그로브가 떠난 후 인텔은 위험을 무릅쓴 대담한 투자를 하지 않았다. 한때 세계 최첨단을 자랑했던 칩 제조능력은 TSMC와 삼성에게 뒤처졌다. TSMC와 삼성은 이제 인텔보다 더 높은 정밀도로 칩을 생산할 수 있다. 인텔은 스마트폰이나 인공지능의 등장을 예견하지 못해 중대한 기로에서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인텔은 기술도 있었고 사람도 있었어요. 단지 영업이익이 떨어지는 걸 감수할 배짱이 없었을 뿐이죠." 인텔의 전직 재무 담당 임원이 내게 한 말이다.

그로브는 은퇴한 후 미국의 첨단제조업 능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오늘날의 제조업이 '포화 상태'라고 저버리면 미래의 신산업에 접근하는 길이 차단될 수 있다." 그가 2010년, 실리콘밸리가 하드웨어를 외면하고 소프트웨어에만 집착하는 걸 경고하며 한 말이다.

그로브는 전기 배터리 산업을 예로 들어 제조능력을 잃으면 결국 혁신의 능력도 잃을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은) 30년 전 소비자용 전자기기 생산을 중단하면서 배터리 산업의 선도 능력을 잃었다." 그로브가 2010년에 한 말이다. 당시 미국 기업은 PC용 배터리 제조기술을 혁신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는 경쟁업체(특히 한국과 중국 업체)에 비해 현저히 전기차용 배터리 제조기술이 떨어진다. "나는 미국 기업이 다시는 경쟁업체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로브의 예언은 암담할 정도로 정확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IT기업' 생태계에서 첨단제조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던 그로브의 경고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의 실리콘밸리 사람들은 그를 지나간 시대의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가 인텔을 일으켜세웠던 것은 인터넷이라는 게 존재하기 전의 시대였으니까. 2006년 설립된 페이스북은 아무것도 제조하지 않고 광고 외에는 별달리 파는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텔에 비해 몇 배 이상의 평가가치를 갖게 됐다. 인텔은 인터넷의 데이터도 반도체 칩에서 처리된다고 반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칩 생산은 앱에서 광고를 파는 것에 비해 수익성이 떨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은 최첨단 프로세서 칩 제조능력을 잃었다. 스마트폰부터 인공지능에 필수적인 고성능의 칩은 이제 국외에서만 생산 가능하다.

반도체 공급망 위기를 겪고 미중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미국의 정·재계 리더들은 점차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다. 반도체 및 과학법의 통과는 지난 수십 년 중 처음으로 미국 정부가 칩 제조사를 지원하기 위해 많은 금액을 투입할 계획임을 보여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첫 발걸음이지만 정치권에서는 제조업의 경영 환경을 개선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건설 허가, 환경 규제, 세금 정책이 모두 제조시설의 사업성에 매우 중요한 결정 요인이다. 반도체 칩의 제조가 경제적으로 사업성이 생기지 않으면 혁신만으로는 미국의 반도체 제조업을 부활시키기 어렵다.



이 글은 국제시사·문예 버티컬 PADO의 '미국이 반도체 경쟁에서 패배한 이유'를 요약한 것입니다. PADO는 통찰과 깊이가 담긴 롱리드(long read) 스토리와 문예 작품으로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을 자극하고, 독자 여러분이 급변하는 세상의 파도에 올라타도록 돕는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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