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사' 이끄는 건 총수가 아니라 '머슴'들!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 2023.02.24 11:35

조성하 정승길 한준우. 뼈저린 현실 깨닫게 하는 메소드 연기 화제

'대행사' 조성하(왼쪽 위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 정승길 한준우 김대곤. 사진제공=하우픽쳐스, 드라마하우스 스튜디오


JTBC 토일 드라마 ‘대행사’엔 머슴들 천지다. 재벌 그룹의 가신들이나 임직원들이 창업주 가족에게 머슴 취급받는 것은 왕왕 있어왔던 일이지만, ‘대행사’에서 ‘왕회장’이라 불리는 창업주 강근철(전국환)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기력이 짱짱한 상왕인 그는 손자손녀의 경쟁을 부추기는 것을 넘어 아들 강용호(송영창) 회장에게도 이렇게 일갈한다. “너도, 한나랑 한수도, 내 자식과 손주이기 전에 내 회사에서 월급 받는 머슴이야.”


창업주가 아들과 손자손녀까지 자신이 세운 왕국에선 결국 머슴이라 하는 마당에, 흙수저 출신 상무 고아인(이보영)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은 그보다 낮은 계급의 머슴일 수밖에 없다. 철저한 신분제 추종자지만, 그래도 왕회장은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 회장보다는 좀 더 머슴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줄 안다. “뭘 고민해, 그런 일은 머슴한테 맡겨. 그러라고 월급 주는 거 아닌가”라고도 말하지만, “머슴이라고 다 같은 머슴으로 보면 안 돼. 주인보다 머리통 굴리는 머슴이 있다. 그럴 땐 시기 질투하지 말고 반드시 니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손녀에게 조언한다. 후계자를 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해 유능한 머슴들을 스파링 파트너로 삼을 줄 아는 사람이 왕회장이다.


왕회장이 세운 VC그룹은 날고 기는 인재들이 모이는 대기업답게 똑똑한 머슴들이 한 가득. 창업주 가족도 갖고 놀 줄 아는 주인공 고아인 상무를 제외하고 살펴보자. 먼저 눈에 띄는 건 고아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최창수(조성하) 상무. 남성에, 일류대 경제학과에, VC그룹 공채 출신이라는 3대 키워드를 가지고 실력과 정치싸움을 거쳐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성공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는 VC기획 대표 자리, 그러니까 마름(지주를 대신해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 자리를 노리는 머슴이다. 짱짱한 스펙답게 인맥에 강점을 보이는데, 대학 동기가 본사 비서실장이라 정보를 물어다 주고, 능력은 좀 보잘것없지만 대학 후배 권우철(김대곤) CD가 자신의 발바닥도 핥을 만큼 충성하며 보필한다. 집안도 괜찮을 것 같은데 재벌은 언감생심인지, VC기획 대표를 위해 창업주 가족, 그중 가장 가능성 있는 장손 강한수(조복래) 부사장에게 허리를 90도로 굽혀가며 아부한다.


조성하, 사진제공=하우픽쳐스, 드라마하우스 스튜디오


VC그룹 본사 비서실장 김태완(정승길)은 최창수보다 한 수 윗길. 강용호 회장의 오른팔이자 그룹 내 이인자로, 비서실장답게 정보에 능통하며 보필하는 창업주 가족의 심기를 파악하는 데 재빠르다. 드라마 초반 강용호 회장이 비서실장이 쓴 원고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고아인과의 통화에서 읽는 모습은, 비서실장이 회장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준다. “다 받아들이세요”라며 부드럽고 위압적으로 말하는 그를 마주하면 누구라도 다 그의 말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김태완의 강점은 처세에 있는데, 최창수가 자신의 깜냥에 한참 못 미침에도 필요에 의해 친밀하게 지내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이는 숨막힐 정도로 냉정하게 압박하며, 후계자 전쟁을 벌이는 왕회장의 손자손녀 중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고 저울질하며 자신의 몸값을 높일 줄 안다.


뒷방에서 바둑이나 두는 노인네 같지만 가장 무서운 존재는 VC기획 대표 조문호(박지일)다. 지금은 정년을 기다리는 신세지만, 과거 왕회장의 오른팔의 위치에 있었기에 그룹의 모든 것을 파악하는 데 능하다. 강한나(손나은)가 VC기획 상무로 오게 된 것에도, 조문호 대표가 있어 강한나를 잘 보필할 것이란 왕회장과 강 회장의 은밀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최창수 상무의 무능이 처음 의심되었던 건, 그가 조문호를 대놓고 이빨 빠진 종이호랑이 취급하는 것 때문이었다. 대기업에서 한 자리했던 사람들을 상담역이니 고문이니 자문이니 하며 퇴임 후에도 대우를 하는 것엔 다 이유가 있다. 그룹에 헌신한 예우 차원이기도 하지만 핵심 경영 현안을 다뤘던 그들이 쥐고 있는 그룹의 비밀이나 총수에 관련된 정보들을 익히 알고 있어 사후 관리 차원에서 대우하는 것이기 때문. 아직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해서인지 최창수는 내려가고 있는 조문호를 은근히 무시하는 우를 범한다. 14화에서 사직서를 내는 고아인을 보며 “내가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네. 잘 쉬었다”라며 바둑판을 닫는 조문호의 모습을 보라. 2월 25일 방영 예정인 15화에서 조문호는 고아인을 구하는 키 맨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을 노장을 허투루 보면 안 되는 이유다.



마름을 노리는 최창수나 현재 마름인 김태완, 전직 마름인 조문호와 달리 박영우(한준우)는 아직 지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강한나 상무의 수행비서에 불과하다. 고2 때까지 복싱 선수였다가 다시 공부를 해 명문대에 들어간 의지의 한국인이지만, 영민한 머리를 지닌 흙수저답게 자신의 처지를 뼈저리게 잘 안다.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강한나에게 “머슴이랑 정분 나면 상무님 미래는 끝인 것 아시죠?”라고 밀어내는 이유다. 14화에서도 자신이 강한나의 약점으로 남지 않게 사직서를 낸 바 있다. 눈여겨볼 건 박영우의 큰 배포. 아무리 사랑에 순수하다지만, 현금 3000억과 계열사 건물 관리하는 회사 지분 100%를 거절하는 건 어지간한 도량과 담력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대행사’의 내부는 물론 드라마를 보는 외부에서도 박영우와 강한나의 사랑을 응원하는 사람만큼 반기지 않는 이들도 많은데, 그들의 사랑이 어찌되든 박영우가 어지간한 지주 찜쪄먹을 스케일의 사람이란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한준우, 사진제공=하우픽쳐스, 드라마하우스스튜디오


사실 한국에서 ‘머슴’은 무척 뼈아픈 말이다. 아파트 경비원을 머슴 취급하며 갑질한다는 사회 뉴스가 종종 일어나는 판국이다. 회사생활을 하는 많은 이들이 ‘우리는 월급의 노예’ ‘회사 노비’라는 말을 자조적으로 우스갯소리처럼 하지만, 제 입으로 회장 또는 사장의 머슴이라 지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은 1997년 한보사건 청문회에서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오너인 내가 알지 머슴(전문경영인)이 자금을 어떻게 압니까”라며 발끈했던 발언을 기억할 것이다. 일부 대기업 총수들이 직원을 어떻게 각인하는지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정작 우리 농경의례에는 한 해 농사가 잘되어 풍년이 이루어지도록 바라는 소망에서 머슴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며 수고를 위로하는 머슴날이 있었다고 한다. 한 해 농사가 머슴들에 의해 갈릴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인식에서 생긴 날일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라. 선거철만 되면 모든 후보자들은 국민의 머슴임을 자청하며 한 표를 호소하지 않던가. 현직 대통령도 작년 이맘때쯤 ‘정직한 머슴’을 자청하며 마름인 대통령에 뽑아 달라 부탁한 바 있다. VC기획을 비롯해 VC그룹이 대기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대행사의 높은 시청률도 종횡무진 활약하는 머슴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중문화에서 일 잘하는 인재들을 대놓고 머슴, 머슴 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은 여전히 있지만, 어쨌거나 세상은 머슴들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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