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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캐슬이 영국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여성이 되던 날, 그는 이렇게 썼다. '난 아무런 환상도 없다. 어쩌면 나는 정치적 자살을 기도하는지도 모른다.'" ━
1969년 초, 캐슬은 <대립을 넘어서>라는 백서를 출간했다. 노동조합을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게 의도였기에 백서는 파업을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고 숙려 기간을 의무화하는 등을 제안했다. 노동조합, 좌파, 자유시장주의 우파들의 공격을 받아 캐슬의 제안은 보류됐다. 노동당 차기 리더로서의 캐슬의 경력은 끝나버렸다.
캐슬은 92세까지 장수했는데(1910~2002) 자신의 예리한 지성으로 노동당 주류 관점의 허점을 지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노동당이 향후 20년간 집권을 못 하리라는 캐슬의 경고는 역사가 입증한다.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승리한 이래 보수당은 1997년까지 집권을 이어 나갔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은 대처의 정책을 계승하면서 2010년까지 집권할 수 있었다. 2000년 2월 <뉴스테이츠먼>과의 인터뷰에서 캐슬은 새로운 노동당 노선이 "시장경제, 세계화, 다국적기업의 지배"를 수용한 데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영국 정치의 백년사를 다룬 필 틴라인(Phil Tinline)의 책 <컨센서스의 죽음: 영국 정치의 악몽 100년>의 초반부에서 바버라 캐슬은 매우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진다. 캐슬은 노사 관계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변화가 있을 것이며 그것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그런 변화는 시행될 수 없었다. 주류의 컨센서스를 위반하기 때문이었다. 노조는 자신을 규제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전간기(戰間期) 유럽 전체주의로 향하는 움직임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캐슬의 개혁은 악몽의 힘에 가로막혀 버렸다. 10년 후, 컨센서스가 무너지고 대처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 <다큐멘트(Document)>로 수상 경력이 있는 라디오 프로듀서 틴라인은 영국 정치사를 1931년부터 1945년, 1968년에서 1985년, 2008년에서 2022년까지 세 시기로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눈길을 사로잡는 디테일로 가득 찬 <컨센서스의 죽음>은 근래 영국 정치를 다룬 서적 중 매우 독창적이고 재미있는 책이다. 저자는 악몽들이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통해 영국 정치사를 설명하는데 매우 설득력 있다. 정치란 단지 이해관계와 이념이 충돌하는 장이 아니다. 보다 나은 미래의 꿈, 그리고 (보다 많은 경우) 재앙과 폐허의 꿈이 충돌하는 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꿈들이 역사를 어떻게 주조하느냐는 당대 정치의 주연 배우들이 어떤 길을 택하느냐(또는 그 길 외에 다른 선택지를 찾지 못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노동당이 캐슬의 백서 <대립을 넘어서>를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분명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한 세대 넘도록 보수당을 지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으리라. 물론 그랬더라도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세계화와 시장 세력이 계속 발전하면서 영국의 전후 컨센서스를 흔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대한 영국의 정치적 대응은 훨씬 부드럽고 정교했을 것이다.
오늘날 신(新)대처주의자들은 영국이 1970년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환영에 사로잡혀 있다. 1979년과 마찬가지로 영국 산업이 무정부상태에 놓이리라는 악몽은 야당에 호재로 작동한다. 과거 '불만의 겨울'에 비견되는 불만의 여름이 고조되고 있다. 노동당 주도의 정부 출범은 당연한 수순이다. 대처와 달리 키어 스타머(Keir Starmer)는 낡은 컨센서스를 고수할 요량이다. 토니 블레어의 신대처주의의 반복이 스타머의 목표인 듯하다. 보리스 존슨은 초기 대처주의 시절로 회귀하려는 것 같다. 정부 내 장관급 고위 인사가 반기를 들지 않는 이상 존슨은 다음 총선까지 보수당을 이끌 것이다. 어쩌면 2023년 조기 총선을 노리고 (앞서 발표했듯) 세입자의 임대주택 매입 권리를 확대하고 감세를 하는 구(舊)대처주의 어젠다를 밀어붙일 수도 있다. 이런 정책이 다음 총선에서 대패할 수 있다는 보수당 의원들의 공포를 잠재울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는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여기에 브렉시트의 아이러니가 있다. 대처를 숭상하는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이성적이었다면 유럽연합 잔류를 지지했을 것이다. 유럽연합은 지난 수십년간 자본과 노동의 흐름이 정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신자유주의적 구조로 형성됐고 그리하여 세계 최대의 자유시장이 됐다. 유럽연합의 기구들이 보다 민주적으로 개혁될 여지는 현실적으로 전혀 없었다. 영국 경제를 보다 집산주의적으로 관리하길 원했던 좌파들이야말로 유럽연합 탈퇴에 표를 던졌어야 했다.
브렉시트는 영국을 위한 새로운 정치경제를 빚어내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정치 계급은 이를 거부했다. 진보 성향 보수당원과 보수 성향 노동당원들은 공통의 생활 양식과 매개자적 제도를 만들어 시장국가를 대체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정당에서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고 이들 사이에서도 자유주의 이후의 어젠다가 무엇인가에 대해 견해가 엇갈렸다. 그리고 닥쳐온 코로나19 팬데믹은 정부가 전체주의적 봉쇄 명령을 내리는 상황과 영국 보건 시스템이 과부하로 무너지는 상황을 택해야 하는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악몽의 선택지"를 가져왔다. 영국이라는 국가가 향후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
신자유주의적 컨센서스를 극복하기 전까지 향후 더 큰 위기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날로 깊어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 때문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어딘가에서 발생할 대규모 군사적 충돌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국 정치는 여전히 같은 악몽에 사로잡혀 있다. 바버라 캐슬에게 이런 경험은 그리 낯선 게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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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국제시사·문예 버티컬 PADO의 ''공포'로 풀어낸 영국 민주주의 100년사 (서평)'을 요약한 것입니다. PADO는 통찰과 깊이가 담긴 롱리드(long read) 스토리와 문예 작품으로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을 자극하고, 독자 여러분이 급변하는 세상의 파도에 올라타도록 돕는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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