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는 그날 밤 11시쯤 복통을 느꼈다. 침대에서 내려와 약 봉투를 뜯었다. 손끝으로 한참 더듬었지만 진통제를 찾을 수 없었다. 약 다섯 알의 모양과 크기가 모두 같았다.
퇴근한 활동지원사에게 전화를 했다. 밤이 늦었지만 배가 너무 아팠다. 활동지원사는 "동그랗고 조그만 약을 찾으라"고 했다. 조씨가 느끼기에 약들은 모두 동그랗고 조그맸다. 조씨는 밤새 배를 움켜잡았다. 이튿날 응급실에 갔더니 다행히 병이 심해지지는 않았다고 했다. 조씨는 그날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는 "시각장애인은 시력 외 다른 감각이 발달해 작은 통증에도 예민하다"고 했다.
적절한 설명서도 없다. 8년 전 '복약 지도서'가 전국 약국에 도입됐다. 조제약 이름과 생김새, 복용 방법 등을 적은 종이다. 점자는 제공되지 않는다. 시각장애인 김모씨는 "약을 들고 약국을 다시 찾거나, 주변 사람에게 묻거나 아니면 아예 안 먹고 만다"고 했다.
복약지도서에 점자를 찍으면 되지만 점자 프린터 한대당 가격은 평균 100만원이 넘는다. 전국 병원, 약국이 한대씩 구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가격'만의 문제는 아니다. 머니투데이가 26일 서울시 상급종합병원 10곳을 전수 조사하니 점자 프린터를 갖춘 병원은 없었다. 보건복지부가 상급 병원에 대해 점자프린터 의무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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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서 산 약 점자도 의미가 없다━
시각장애인 한수혁씨(55)는 지난달 머리가 아픈데 소화제를 먹었다. 한씨는 얼마 전부터 두통이 잦아서 편의점에서 T모 약을 사뒀다. 막상 약을 먹으려니 약상자들에 점자가 없었다. 한씨는 "약을 만져보니 소화제와 두통약 크기, 모양이 비슷했다"며 "두통약 대신 소화제를 먹었는데 그랬더니 머리가 더 아파졌다"고 했다.
점자가 찍혀도 문제다. 머니투데이는 지난 21일 시각장애인 조씨에게 점자가 표기된 의약품 5개를 줬다. 4개 제품은 약 이름, 제약회사 이름이 점자로 찍혀 있었다. 정작 필요한 약의 기능, 복용법은 점자로 찍혀 있지 않았다.
1개 제품만 '소화제'가 점자로 찍혀 있었다. 이 제품도 한 번에 몇 알을 먹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복용 방법은 점자로 설명하지 않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일부 의약품에 점자 표기를 의무화하는 '약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은 국회를 통과해 2024년 7월 시행된다.
개정안 적용 대상은 △상비 의약품 △식약처장이 지정한 품목이다. 병원·약국 조제약이 포함될지는 미지수다. 또 현재 상비 의약품에 찍힌 점자가 너무 얕거나 점자 사이 간격이 불규칙해 읽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식약처 관계자는 "조제약 등을 점자 표시 대상에 포함할지는 장애인 단체, 관련 업계와 지속해서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금까지 상비 의약품 점자 표기는 권장 사항이라서 기존에 마련된 점자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라며 "2024년 7월부터는 가이드라인을 따라 점자 수준이 높아질 테지만 법 시행 전까지 가이드라인을 보강하는 등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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