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 청소년문화센터 2층 거실이 오전부터 고려인 동포들로 붐볐다.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은 고려인 동포 4명이 러시아어로 대화를 나누며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낯선 러시아어 사이로 김치, 이모 같은 단어가 들린다. 이날은 코로나19(COVID-19) 유행으로 중단됐던 고려인 마을 추석행사가 3년 만에 다시 열리는 날이다.
미용실과 세탁소 간판이 러시아어로 돼 있는 이 마을에는 길을 걷다 마주치는 이웃끼리 인사하고 음식을 나누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날 오전에도 마을 중앙에 있는 청소년문화센터에는 추석잔치를 돕기 위해 모여든 이웃을 위해 양(소의 위)을 넣고 끓인 국, 오이 토마토 샐러드, 토마토 장아찌 등 고려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점심상이 차려졌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에는 추석 때면 대형 강당을 빌려 잔치를 벌였다. 3년 만에 여는 이날 잔치를 위해 고려인마을 측이 준비한 선물만 1.5t(톤) 트럭 4대 분량이다. 최세르게이(23)와 박안드레(32)등 고려인 청년들은 오전부터 청소년문화센터에서 인근 홍범도 공원으로 선물을 옮기고 테이블을 설치하는 등 행사를 준비하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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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부르고 선물 받은 고려인 어린이들…3년만의 행사에 1000여명 참석━
3년만에 열린 추석축제는 고려인마을 어린이합창단의 아리랑 합창으로 시작됐다. 신조야 광주 고려인 마을 대표는 "고려인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한다"며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고려인 동포들이 모이지 않으면 어떡하지라고 걱정을 했는데 괜한 고민이었다"고 했다. 이날 행사에는 동포 1000여명이 몰렸다.
월곡동 고려인마을 주민 중에는 우크라이나 출신도 있다. 지난 2월 러시아 침공 후 고려인마을 측에서 항공권을 지원해 동포 644명이 입국했다. 고려인마을 측은 이들에게 월곡동 인근 원룸을 마련해주는 등 주거와 의료, 교육 등을 지원하고 있다.
가족 모두가 한국에 들어온 동포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김따치아나씨(33)는 지난 7월 우크라이나 헤르손에서 딸 넷과 함께 고려인 남편이 있는 한국으로 탈출했다. 김씨 첫째 딸 미아양(15)은 월곡동 인근 중학교에 다닌다. 아직 서툰 한국어 때문에 학교에서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전부다.
고려인 친구가 통역을 도와주지만 미아양에게는 한국인 친구들이 많이 사용하는 카카오톡보다는 우크라이나 친구들이 많이 쓰는 텔레그램이 편하다. 미아양이 들어가 있는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은 학급알림용 방 하나뿐이다. 미아양은 하루 종일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지만 대부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헤르손에 남은 친구들과 텔레그램으로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고려인 남편이 있는 광주로 탈출한 ㄱ씨도 헤르손에 친척들이 남아 있다. ㄱ씨는 3일 아들 니키타(13), 발레리(11)와 한국에 도착했다. 헤르손에 있을 땐 거리를 메운 탱크와 장갑차, 러시아군인들 때문에 잠깐 외출하는 것도 어려웠다. 한국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니키타와 발레리군은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 하지만 얼굴엔 여유가 넘친다. 니키타군은 "독일보다 한국이 좋아 한국에 왔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에 남은 고려인들의 탈출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출신 고려인들은 자신들이 탈출할 때 지났던 국경 중 상당 부분이 현재는 폐쇄됐다고 말한다.
외교부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우크라이나 내 고려인은 약 1만2000여명 규모다. 동포단체들은 무국적 상태로 우크라이나에 체류중인 고려인이 상당한 규모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인마을 측은 연말까지 우크라이나에 남은 고려인 400여명의 한국행을 도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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