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전환이 시작된 건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이다. 서울올림픽은 양쪽 진영 160개국이 동시에 참가, 냉전 종식을 알리는 축제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듬해인 1989년 6월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고, 같은 해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1년에는 소련 연방이 해체됐다.
이 숨가쁜 일련의 사건들 중심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마지막 대통령이 있다. ( '고르비'라는 애칭으로도 익숙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40여년간 이어진 냉전·공포 시대의 막을 내리고 인류에게 평화를 선물한 장본인. 소련이 해체된 지 31년째인 2022년, 그는 91세의 나이로 숨졌다(현지시간 8월 30일 사망).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으로 그토록 바랐던 세계 평화가 위태로운 이 날, 그는 어쩌면 눈을 감기 어려웠을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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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법대 졸업한 인재…소련 공산당서 초고속 승진━
고르바초프는 대학 재학시절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고,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관리의 길을 걸었다. 지방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당으로 진출, 초고속 승진했다. 공산당 지도부는 술을 멀리하고, 불평 없이 일하는 그의 근면함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소련 공산당 최연소 정치국원을 거쳐 1985년 서기장, 1988년 소련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에 올랐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1990년 대통령제를 신설한 소련 연방이 1991년 해체됐기 때문이다.
부인 라이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 부인이 백혈병으로 숨진 뒤 고르바초프는 "라이사가 떠난 후 삶의 의미를 잃었다"며 "여러 달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처박혀 지냈다"고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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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비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도 쉽지 않았다━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의 독일 통일 지지 요청에 고르바초프는 순순히 응했다. 당시 동독에는 소련군 50만명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가 반대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다. 통일이 이뤄졌더라도 평화적인 방식이 아닌 피의 대가를 치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소련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군대를 철수할 비용조차 없었는데 고르바초프는 무조건 독일 통일에 찬성한 뒤 나중에 군 철수 비용을 독일에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세계 냉전을 종식하고 독일 통일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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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비가 나라 망쳐"…러시아 우익들의 혹평━
고르바초프는 199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0.5%라는 처참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전 세계에 평화를 선물했지만 러시아 내부에선 미움을 받았다. 우익 성향 국민들은 "소련을 망하게 한 장본인"으로 평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라며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손대고 싶은 사건"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 2004년 퓰리처상을 받은 윌리엄 타우브만은 고르바초프의 삶을 저술한 책에서 "소련을 스스로 무너뜨림으로써 인류를 구했지만, 자신은 정치적으로 몰락한 고르비는 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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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고르비는 외쳤다…"당장 전쟁 중단해"━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재단 성명을 통해 당장 전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 재단은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첨예한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호 존중과 이익에 입각한 협상과 대화가 유일한 방법"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러시아는 즉각 적대 행위를 멈추고 평화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따르면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이후 이달 21일까지 1만3477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지난 1일 기준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난민 수가 1017만800명이라고 밝혔다. 2차 대전 이후 발생한 최대 규모다.
고르바초프의 사망 소식을 접한 이 날, 이 같은 역사적 상상을 해본다. '소련을 해체해 세계 냉전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고르바초프가 러시아 정권 장악에 성공했다면 오늘날 미치광이 푸틴을 마주하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푸틴은 소련시절 비밀경찰인 KGB에서 은퇴해 시골마을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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