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는 12일 오전 서울의 L사 햄버거 프랜차이즈점에 들렀다. 햄버거집에 주문을 받는 카운터는 없었다. 벽 한켠에 키오스크(무인주문기)만 세 대 놓여 있었다.
이씨에게 키오스크 화면은 의미 없는 '빛덩어리'였다. 주문 첫 화면은 간단한 편이었다. '기다리지 않고 간편하게 여기서 주문하세요' '화면을 터치해 주세요'라고 써져 있었다. 이씨는 귀를 댔다. 음성 안내는 들리지 않았다.
주문은 △화면 터치 △카드/교환권/현금 선택 △메뉴 선택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세트 메뉴를 시킨다면 △빵 종류 △사이드메뉴 △음료를 추가로 선택해야 한다. 메뉴를 고른 후에는 화면 아래 '결재하기'를 누른다. 이어 △포장/매장 선택 △할인/적립 선택 △결제 수단 선택을 한다.
연신 "아" 한숨짓던 이씨가 키오스크 이곳저곳을 눌렀다. 어떤 게 눌리는지 모르는 듯 했다. 4500원, 6100원 햄버거 세트 두개가 담겼다. 파인애플 주스를 담지 못했는데 적립 화면에서 휴대폰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원래 햄버거 세트를 시키려 했느냐'고 묻자 이씨는 "아니다"라며 "오늘 내로 먹을 수 있으려나요"라고 했다.
바깥 기온은 섭씨 28도가 넘어가고 있었다.
사실 햄버거는 이씨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예전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먹었다고 한다. 키오스크가 없을 때 얘기다. 그때는 눈치껏 줄에 서서 앞사람이 주문한 소리를 듣다가 직원이 '다음 분' 부르면 '저요?' 한번 물은 뒤 가서 주문했다.
그때는 직원도 많았다. 이씨는 주문 후 직원에게 '빈자리까지만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물었다고 한다. 손님이 많지 않다고 느껴지면 '메뉴를 자리까지만 가져다 주시겠습니까' 물은 적도 있다. 이씨는 "이제는 앞이 보이는 사람과 오거나 키오스크 주변 다른 손님에게 부탁한다"고 했다.
이씨는 이날 오전 11시19분쯤 주문을 시작했다. 5분가량 지나도 진척이 없자 저시력 장애인 친구 강석철씨(37) 도움을 받아 겨우 초기 화면으로 돌아갔다. 주문을 다시 하려는 심산이었다. 옆 키오스크 손님은 햄버거 세트를 시키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씨는 "키오스크가 (주스 먹지 말라고) 내 건강을 챙겨주는 것 같다"면서도 "먹고 싶은 것을 맘대로 주문할 수 없으니 우울해진다"고 했다.
이씨는 강씨 도움을 받아 11시45분쯤 파인애플 주스 두개를 주문했다. 주문을 끝내는데 약 26분이 걸렸다. 주문번호 215번이지만 키오스크가 음성으로 읽어주지는 않았다. 이씨는 기쁜지 영수증을 두손으로 쫙 펴들고 웃었다. 강씨는 "난 저시력 장애라 희미하게 보이지만 다른 시각 장애인들이 도움 없이 주문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며 "무슨 메뉴가 눌러졌는지, 카드를 넣어야 하는지, 영수증이 나왔는지 읽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캠페인은 보건복지부가 최근 공청회에서 공개한 키오스크 접근성 강화를 위한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안에 반발하는 취지로 기획됐다. 장애인 키오스크 이용시 '정당한 편의 제공'을 의무화하도록 하는 내용의 시행령은 내년 1월에 시행되지만 3년 유예기간이 있다.
권리보장연대는 "시각장애인들은 키오스크에 판매되는 상품들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고, 다른 손님에게 피해 주는 게 두렵고 미안해 매장 이용을 포기하고 있다"며 "변화가 생기기 전까지 문제제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시각장애인들은 '키오스크 때문에 불편한 곳이 많느냐'고 묻자 답을 쏟아냈다. 인천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인 정민섭씨(21)는 "대학 식당과 카페도 키오스크 주문을 해야 한다"며 "일부 공립 도서관도 열람실 자리를 맡거나 책을 반납할 때 키오스크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은 웬만한 시설에 키오스크가 다 들어선 것 같다"며 "물론 누가 도와준다면 이용할 수 있지만 난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혼자 일을 해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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