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의 봄, 혹은 도둑맞은 자유[광화문]

머니투데이 양영권 사회부장 | 2022.07.04 05:00
서울 세종대로 성공회교회 앞 인도에 군복을 입은 노병들이 도열했다. 그들 손엔 총 대신 육군사관학교, 육군3사관학교 등 각종 학교 깃발이 들려 있다. 100미터쯤 떨어진 코리아나호텔 앞에는 진보단체 회원들이 모여 '조중동 폐간' 팻말을 들었다. 바로 옆 감리교본부 앞에서는 보수 종교인들이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맞은편 서울파이낸스센터 쪽으로 눈을 돌리자 파룬궁 수련자들이 입간판을 걸어놓고 수련에 열중이다. 청계천광장을 건너 지하철 광화문역 5번 출구 앞으로 나가자 또다른 보수단체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무효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바로 옆 동아일보사옥 앞에서는 어느 기업 모델들이 나와 행인들에게 신제품을 시연한다.

민소매 티를 입고 배낭을 멘 외국인 여행객 커플이 무심히 지나간다. 엄마아빠 손을 잡고 청계천 나들이 나온 아이의 얼굴이 무표정하다. 각각의 집회 참여자들이 갖고 나온 확성기에서는 계속해서 소리가 퍼져 나오고 있었지만, 옆 집회의 확성기에서 나온 소리가 '노이즈 컨트롤' 기능을 하는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

6·25 전쟁 발발 72주년이었던 지난달 25일, 당직 근무를 위해 시청역에서 내려 청계천 초입에 있는 회사까지 걸으며 본 광화문 일대 풍경이다. 코로나19가 엔데믹(풍토병)으로 바뀌면서 집회 규제가 완화되자 2년여 동안 조용하던 거리에는 구호와 투쟁가가 넘쳐난다.

그야말로 '광화문의 봄'이다. 목소리들이 상쇄되면서 물리 법칙대로 각각의 주장들의 호소력은 반감된다. 그럴수록 집회 참여자들의 목소리는 더 높아진다. 가중되는 것은 그같은 외침을 일상적으로 접해야 하는 일반 시민들의 고통이다.

세종대로 같은 다중이 찾는 장소에서 열리는 집회는 그나마 고통이 덜하다. 시위는 주택가, 학원가를 가리지 않고 침투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대기업 대주주들의 집이 모여 있는 서울 한남동 고급주택가는 노동조합 등의 단골 '시위 맛집'이 됐다. 경남 양산의 문재인 전 대통령 동네 주민이나 서울 서초동 윤석열 대통령 자택 건물 입주민들은 "시위 때문에 정상생활이 힘들다"고 연일 호소한다.

서울 강남 SPC 건물 앞 주상복합에는 노조 시위에 따른 고통을 호소하는 플래카드들이 내걸렸다. 서울 신촌동의 연세대 재학생 몇몇은 캠퍼스 내 시위로 수업에 집중할 수 없다며 노조 관계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부 집회에 수반되는 불편이 일반 시민들의 '수인한도(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섰다.


목소리가 높은 집회 주도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미디어와 정당이 있는 이들이다. 그들이 거리를 점유할 때, 거리에 나서는 것밖에는 수단이 없는 어떤 이들의 음파는 상쇄간섭이 돼 '0'으로 수렴한다.

강한 자극에 피로해진 시민들은 점점 다른 목소리에도 무감각해진다. 광화문에서 보수, 진보 단체들의 깃발이 늘어갈수록 청계광장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반년째 특별법 제정 등을 요구하고 있는 백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일 여유가 사라지는 식이다.

집회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권이다. 취임사에서 여러 번 '자유'를 강조한 대통령 답게 윤석열 대통령도 "대통령 집무실도 시위가 허가되는 판"이라며 옹호했다. 하지만 우리가 도덕 교과서에서 배웠듯 자유는 '프리덤(Freedom)'만 있는 게 아니라 '리버티(Liberty)'도 있다. 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자유로운 시장'을 말할 때는 프리덤이겠지만, '자유민주주의'를 말할 때는 리버티다.

프리덤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면 리버티는 책임을 수반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On Liberty)'에서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누려야 한다고 했다. 나의 권리를 생각할 때 남의 권리도 존중하는 게 리버티다. 나의 자유를 누리고 있을 때 내가 누군가의 자유를 도둑질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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