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간을 야만의 상태로 되돌리는 전쟁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전쟁 상태를 끝내기 위해 다양한 무기지원을 통해 전쟁을 계속하는 역설에 직면했다. 흔히 이 전쟁을 계기로 신냉전 시대의 개막을 말하지만 냉전 시대는 이데올로기 및 군사적 대결을 축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이 나뉜 채로 비교적 안정적인 국제질서를 누렸다는 점에서 현재 상황과 다르다. 냉전 이후 세계는 지구화를 거치며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했고 이념과 무관하게 서로의 이익과 정체성이 다양하게 맞물리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주권국가의 외교·안보 전략은 기본적으로 정체성(identity)과 이해(interest) 사이 균형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 열망과 제국주의적 팽창이 부딪치는 가운데 힘을 중심으로 한 국제경쟁에서 이익의 추구도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와 원칙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러니까 현재의 고립주의적 국제질서 전환을 단순하게 냉전시대 회귀로 파악할 수는 없고 한미동맹 강화만으로 대응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세계질서의 3대 축을 아시아, 미국, 유럽이라고 한다면 한미동맹 외에도 아시아 및 유럽과 관계증진을 지렛대로 가치와 원칙의 다자외교를 강화하는 글로벌한 비전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윤 대통령을 '2022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했을 때 뒤따른 해설은 '외교·안보 경험이 없고 지지를 얻기 위해 반페미니즘을 무기화'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한국이 이미 선진국으로서 국제질서에 신뢰와 표준의 공공재를 제공할 의무가 있음을 전제하고 한국이 그 표준에서 벗어난 데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다. 예컨대 아베 신조 총리와 같은 일본 정치인들이 일본의 국제적 위상에 걸맞지 않게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망언을 일삼으며 아시아의 이웃 국민들조차 설득하지 못하고 세계시민적 비전과 거리가 먼 국내용 정치인에 머물 때 우리가 느끼는 실망감을 생각해보라!
물론 미국의 상대적 쇠퇴가 국내 정치의 실패에서 시작됐듯이 우리가 내세우는 글로벌한 비전도 국내 사회문제 해결을 바탕으로 한다. 그 위에서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정체성이 무엇이고 어떤 이익을 추구하는가에 따라 연대할 국가를 정하고 동맹전략을 주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그 동맹에 미국도 당연히 포함되겠지만 미국이 동맹의 전부라고 말하면 점차 다극화하는 국제질서에서 너무 단순한 답이다.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는 서로 대립하는 A 또는 B의 이분법적 선택상황은 정치에서 실패와 무능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미국 아니면 중국, 좌파 아니면 우파, 힘 아니면 도덕의 어느 한쪽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제3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일이 정치인의 임무고 뛰어난 지도자가 고민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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