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의 전쟁

머니투데이 이정렬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 | 2022.05.30 23:30

[the L]화우의 조세전문가들이 말해주는 '흥미진진 세금이야기'

[서울=뉴시스] 권창회 기자 = 사진은 4일 오후 서울 성동구 이마트24 점포에서 고객이 위스키를 고르는 모습. 2022.05.04.



술을 조금이라도 먹는 사람이라면, 전날밤 술자리에서의 실수 때문에 시쳇말로 '이불킥'을 했던 기억이 한 두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영의정까지 지냈던 신숙주의 일화를 들으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질 지 모르겠다.

신숙주와 세조는 서로 동갑내기로 흉금을 터놓는 사이였다. 한번은 세조가 술을 마시고 신숙주의 팔에 기대면서 "자네도 한번 나에게 기대보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술이 한참 오른 신숙주는 대뜸 임금의 팔을 꺾었고, 세조가 아프다고 소리치자 옆에 있던 세자와 신하들은 사색이 되었다.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한 인물임을 감안하면 그 자리가 두 사람의 '마지막 만찬'이 되었더라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다행히 세조는 주연의 흥을 깰까 웃으며 넘어갔고, 신숙주는 적어도 능력만큼은 누구나 인정하는 명재상으로 역사에 남았다. 물론 반쯤은 야사(野史)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신숙주가 대단한 애주가였다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우리네 애주가들의 술사랑은 시대를 막론한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는 시구(詩句)로 유명한 시인 천상병은 '비오는 날'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원 훔쳐 아침 해장을 간다. 막걸리 한 잔에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라고. 아내의 돈을 훔쳤다는 사실보다 해장을 하러 가서는 또 속이 찌릿하게 막거리를 걸쳤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다.

나이만큼이나 상대방의 주량(酒量)을 궁금해하는 한국인의 '술사랑'에 비례하여 이를 막으려는 국가의 노력도 고금을 막론한다. '인간의 욕망을 과도하게 억제하는 정책은 실패한다'는 명제의 근거로 종종 미국의 금주법(禁酒法)을 들지만 역사로 따지자면 금주법의 역사는 우리나라가 훨씬 깊다. 가장 강력한 금주법을 시행한 것으로 손꼽히는 왕은 조선시대 영조다. 영조는 왕위에 등극한 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국정지표를 발표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술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약(狂藥)이니 엄금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반한 벌도 미국 금주법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영조는 본보기로 남대문 앞에서 금주령을 어긴 고위관리의 목을 쳤고, 이를 만류하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세 사람을 그 자리에서 파직했다. 이건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정사(正史)다.

조선시대에 금주령을 실시했던 것은 도덕적인 이유도 없지 않았겠으나 많은 경우는 곡식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금주령은 기근이 심한 봄이나 여름에 반포되어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해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쌀로 술을 빚으면 그 양이 투입량의 절반도 안되는 데에다 술은 마셔도 배가 부르지 않은 까닭이다.

국가와 국민간의 술 전쟁은 오늘날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회식 공화국'에서 회식의 씨를 말리고 있는 코로나 방지대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외로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는 '세법(稅法)'이다.


주세법은 다른 세법처럼 과세대상이나 과세표준에 대해서만 정하고 있지 않다. 주세법은 술의 판매와 취득 방법을 제한하는 규정도 잔뜩 담고 있다. 주류의 제조, 도매, 소매를 위해서는 식약처나 구청이 아닌 세무서장의 면허가 필요하다. 2020년 주류 면허와 관련된 사항을 별도로 규율하기 위한 '주류 면허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이러한 사항들이 모두 주세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요즘 꽃, 커피 심지어 자동차까지 사업자가 임의로 선택한 상품을 소비자에게 보내주는 이른바 '구독서비스'가 유행하고 있지만, 술에 대해서는 '구독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 국세청이 제공될 주류는 주류 매매계약의 체결시에 확정되어야 한다고 유권해석하고 있어 사업자가 임의로 주류를 선택하여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일이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굳이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SNS 메신저로 커피 쿠폰은 물론 명품 가방까지 선물할 수 있는 시대지만 술은 예외다. 국세청이 주류를 구입한 사람과 수령할 사람을 달리 정할 수 없다고 유권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 흐름에 따른 서비스 변화에 발맞추어 주류 업계가 다양한 사업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지만 모두 주류 규제에 가로막혀 실현이 요원하다.

소주의 원료가 되는 '주정(酒精)'에 대한 규제는 더욱 강력하다. 국세청장은 매년 주정 연간생산량을 정하고, 각 제조장에 주정생산량을 배정한다. 전국의 주정 제조회사는 9개 밖에 없는데, 이들은 국세청장의 승인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산한 모든 주정을 일단 대한주정판매 주식회사라는 전국 유일의 주정 도매회사에 납품해야 한다. 술자리에 소주 회사 직원이 불쑥 나타나 판촉 상품과 함께 자기 회사 소주 뚜껑을 따 놓고 떠나는 일이 심심찮게 있을 정도로 소주 소매시장은 과열 양상을 띠고 있지만 정작 주정 시장은 국가의 철저한 통제 하에 독점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소주의 질이 좋아지려면 좋은 주정을 사용해야 하지만 전국 소주회사들이 사용하는 주정은 대한주정판매 주식회사가 파는 주정 한 가지뿐이고, 소주회사들이 임의로 주정 제조회사를 선택할 수도 없다.

현재 주류의 생산과 판매를 이토록 강력히 규제하는 것이 조선시대처럼 쌀이 부족해서 때문은 아닐 것이다. 쌀 소비량은 거의 매년 최소치를 갱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술이 중요한 세원(稅源)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주세가 전체 국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 남짓이다. 증권거래세는 연간 징수액이 주세의 두배가 넘지만 국세청이 증권거래를 통제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설득력 있는 명분은 국민보건이다. 하지만 그것도 주류 '소매'가 아닌 '제조'와 '도매' 부문의 통제를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올해 할당된 술 생산량이 소진되었다'는 이유로 술을 못 먹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술 생산을 통제한다고 술 소비량을 줄일 수는 없다. 소주가 없으면 수입 맥주도 있고, 양주도 있다.

프랑스의 와인, 독일의 맥주, 영국의 위스키, 일본의 사케처럼 술도 그 나라의 중요한 문화 자산이다. 자신의 팔을 꺾어도 만취한 신하를 너그러이 용서했던 세조처럼 이제 국가가 주류에 대한 통제를 조금은 놓아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 이정렬 변호사는 화우 조세그룹에서 관세 관련 쟁송 및 자문 사건을 주로 수행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에서 조세법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2020년과 2021년 Asia Pacific LEGAL 500 Leading Lawyer에서 조세부문 Rising Star로 선정된 바 있으며, 현재 국제조세협회 YIN한국지부 이사 및 한국지방세학회 청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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