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배트맨’ 셜록이 박쥐 옷을 입고 밤에만 돌아다닌다면…
DC 팬들에게 배트맨(브루스 웨인)은 어쩌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다. 토니 스타크가 나노 테크로 온 몸을 두르고 캡틴 아메리카가 성조기를 본뜬 비브라늄 방패를 들고 다녀도 DC 팬이 견딜 수 있었던 건 ‘우리에겐 배트맨이 있다’는 자부심 그 하나로 버틴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런 배트맨도 DC 팬들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적이 몇 번 있다. 발 킬머 주연의 ‘배트맨 포에버’나 조지 클루니 주연의 ‘배트맨과 로빈’ 등이 DC 팬들의 소위 ‘배트맨부심’을 무참히 깨뜨린 대표작이다.
DCEU 벤 에플렉의 배트맨은 또 어떤가. 잡졸에게도 무참히 털리는 것도 모자라 슈퍼맨을 죽이겠다고 덤벼들더니 엄마 이름이 마사(Martha)라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친구가 되는 광경을 목도했으니 뒷목이 저려오는 느낌이다.
이처럼 배트맨은 어느새 DC의 자존심에서 아픈 손가락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들려온 로버트 패틴슨 주연, 맷 리브스 감독의 ‘더 배트맨’은 문자 그대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으며 관객들과 만났다.
‘더 배트맨’은 기존의 슈퍼 히어로 영화 나아가 기존의 배트맨 시리즈와도 완전히 그 궤를 달리한다. 액션도 존재하고 첨단 기술도 존재하지만 이 작품에는 순간이동도, 인피니티 건틀릿 같은 아이템은 없다. 엄밀히 말하면 ‘더 배트맨’을 슈퍼 히어로 영화로 볼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이 작품은 배트맨이 자경단 활동을 시작한 지 2년 정도 흐른 시점을 다룬다. 그리고 음침하게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할로윈 시기를 다룬다. 원작 코믹스에서도 호평을 받은 ‘배트맨 이어원’, ‘롱 할로윈’의 분위기를 적극 차용해 ‘DC는 역시 어두워야 제 맛’이라는 명제가 옳았음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더 배트맨’은 극이 더해질수록 추리물 혹은 스릴러 장르임을 강조함으로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온 배트맨이 ‘가짜’였다는 걸 알린다. 배트맨은 박쥐 옷을 차려 입고 우주급 외계인과 싸우는 일이 본업이 아니라 ‘세계 최고의 탐정’(The World's Greatest Detective)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캐릭터라는 걸 각인시키는 것이다.
‘더 배트맨’은 이를 위해 공포 가스를 만드는 스케어 크로우나 하수구에 사는 돌연변이 킬러 크록 같은 캐릭터들이 아닌 리들러(폴 다노)를 주요 빌런(악당)으로 내세웠다.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내용을 알 수 없는 암호, 동기를 짐작할 수 없는 리들러의 행보를 배트맨이 쫓게 함으로서 ‘탐정’ 배트맨의 매력을 관객 스스로 깨닫게 한 것이다. 이 작품을 엔터테인먼트가 가득한 액션물이 아니라 추리 스릴러로 만든 것도, 리들러를 빌런으로 내세운 건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더 배트맨’의 또 다른 탁월한 선택을 꼽자면 셀리나 카일(조이 크래비츠)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는 점이다. 쉼 없이 비가 내리는 고담시의 거리, 단서를 찾기 위해 클럽을 찾은 탐정, 그 클럽에서 만난 매력적인 여성의 등장. 셀리나 카일의 등장으로 인해 ‘더 배트맨’은 매우 매력적인 탐정 소설에서 더욱 더 매력적인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로 진화한다. 여기에 셀리나 카일이 지닌 출생의 비밀(?)까지 더해지면 오렌지 주스를 마시다가 주르륵 흘려버린 어느 드라마 속 캐릭터의 심정도 십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더 배트맨’이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로 진화하면서 로버트 패틴슨의 음울한 얼굴은 더욱 빛을 발한다. 아주 조금 과장을 보태면 이 ‘창백하고 음울한 얼굴’ 때문에 배트맨으로 낙점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다크 나이트’ 3부작의 크리스찬 베일의 배트맨이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목소리까지 긁어대는 배트맨이었다면 반대로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은 복수에 굉장한 의욕을 보이는(?) 허무주의자다. 이 허무주의자 배트맨이 극 중후반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이 된 작품의 분위기와 만나 폭발적인 시너지를 만들어 낸다.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은 지금까지 계속 강조해 왔던 것처럼 추리 스릴러에 가깝다. 아니 이건 가까운 게 아니라 누가 봐도 어엿한 추리 스릴러물이다. 다만 탐정이 박쥐 옷을 입고 다니는 특이 취향일 뿐.
따라서 두뇌를 쓰는 것보다 속이 뻥 뚫리는 액션을 원한다면 다른 영화를 관람할 것을 추천 드린다. 그리고 배트맨의 얼굴을 더 좋은 화질로 보고 싶어서 아이맥스(IMAX)로 보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액션 쾌감을 느끼겠다고 4DX로 보고 그러진 말자. 아껴야 잘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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