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까만 말 '까미'는 예전처럼 인간을 위해 달렸다. 한때는 이기기 위한 경주를 하려 경마장을 한껏 내달렸었다. 그러나 이번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발목에 와이어가 묶여 있었다. 십여 명의 성인들이 까미 다리를 묶은 줄을 잡아당겼다. 까미는 목이 꺾여 고꾸라졌다. 늘 그랬듯, 달리려 했던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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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아닌, 명백한 동물학대…"CG나 모형 사용토록 권장 추세"━
특히 드라마 촬영시 이뤄진 동물학대는 '도박·광고·오락·유흥을 목적으로 동물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이기 때문에, 동물보호법 제2항 제3호도 위반한 거라고 했다.
동물권행동 카라는 관련 장면을 촬영할 경우, "예민한 말의 특성을 감안해 CG(컴퓨터 그래픽)나 모형을 사용토록 권장하는 추세"라고 했다. 스트레스 유발을 최소화하고,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카라가 국내 영화 촬영 및 방송 관계자를 취재한 바에 따르면, 대체로 경주마에서 은퇴하거나 경기 성적이 좋지 않은 말들이 관행처럼 촬영 현장에 동원돼 온 것으로 나타났다. 태종 이방원을 촬영하다 숨진 까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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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내내 잠을 못 자게 말을 찌르기도"…동물을 '소품'으로 취급해━
카라가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해 2020년 6월 미디어 종사자 15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58.5%는 "CG 장면 연출을 고려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유로 "예산 부족(41%)"과 "CG로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이어서(33%)" 등을 꼽았다.
촬영 현장서 동물이 스트레스 받았단 점에 대해선 59%가 "그렇다"고 했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촬영 중 놀란 말을 멈추기 위해 전기충격기를 썼다", "새벽 내내 잠을 자지 못하도록 말과 토끼를 일부러 찔렀다", "말이 갯벌로 나가야하는데 움직이지 않자, 조련사가 승마장을 돌며 매질을 가했다"고 했다.
출연 동물의 안전에 대해서도 61%가 "위험하다"고 답했다. 한 응답자는 "동물 사용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감독 A는 개를 죽이는 장면을 굳이 넣었고, 최소한의 특수 분장과 CG를 권했지만, '그만큼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될' 장면이라 여겼다"고 했다. 결국 촬영 당시 개를 사육장에 가두고, 목덜미를 계속 잡고, 가짜 칼로 위협당하는 장면을 찍었다.
말 출연 영화를 찍은 또 다른 스텝도 "동물 촬영 시간, 휴식 시간에 대한 정해진 규칙이 없었다"며 "촬영 전후, 촬영시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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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말 촬영 가이드라인만 '34쪽' 달해…"K컬쳐 격에 맞는 동물보호제도 정착돼야"━
2015년에 발간된 해당 가이드라인을 살펴보니, 그 내용만 무려 132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상세했다. 8가지 챕터에 걸쳐 동물 촬영의 대원칙, 수의사 케어 방법, 제작진의 체크리스트, 문제 해결 방법, 안전성 확보, 특수효과, 동물별 구체적인 가이드라인 등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KBS가 제대로 된 동물 촬영 가이드라인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카라는 "경찰 고발을 통해 법적 책임을 묻고, 어느 동물도 해를 입지 않게 안전한 동물 촬영 가이드라인 마련과 준수에, 방송사의 실질적 노력을 촉구할 계획"이라고 했다. 동물자유연대도 "말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방송 촬영을 위해 빈번하게 발생하는 동물 학대를 막고, 동물을 위한 안전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김성호 한국성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영상 제작시 동물 보호는, 동물 뿐 아니라 사람의 안전한 환경도 조성하게 한다. 동물권이 신장되면 인권은 더 신장된다"며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등 K 문화의 격에 맞는 수준의 동물보호제도와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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