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프리즘] '설강화' 논란이 아쉬운 이유

머니투데이 성연광 에디터 | 2021.12.31 06:01
JTBC 드라마 '설강화' 방영 장면/출처=JTBC 홈페이지.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술 취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 가지고 오셨어요." 1985년 발매된 '아빠와 크레파스'의 원 가사란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양현경씨가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에 출연해 밝힌 후일담이다. 그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크레파스를 사온 어릴 적 회상을 노랫말에 담았다. 하지만 그 표현이 사회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의에 걸려 '다정하신'으로 바꿨다는 '웃픈' 사연이다. '동요' 같은 이 노래도 '불가' 판정을 받았다니. 서슬퍼런 군사정권 시절 콘텐츠 검열은 그만큼 엄혹했다. 영화, 드라마는 물론 노랫말 한 구절 한 구절 모든 창작물이 군부의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국가검열이 풀리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다. '여명의 눈동자'(1991년 방영) '모래시계'(1995년) 등 희대의 명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위안부, 4·3제주항쟁,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동안 금기시한 현대사를 배경으로 다룬 이들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 50%대를 넘나들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문화영역 전반에 걸쳐 창작·표현의 자유가 비약적으로 확장됐다. '공동경비구역 JSA' '공조' '백두산' '아이리스' '사랑의 불시착' 등 분단의 아픔과 남북간 우정과 사랑을 그린 영화·드라마들까지 별다른 제약없이 쏟아져나왔다.

#JTBC 드라마 '설강화'를 둘러싼 논란은 그래서 안타깝다. 여대생과 북한 간첩의 로맨스를 다룬 이 드라마는 방영 전부터 '민주화운동 폄훼'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미화' 논란으로 시끌시끌했다. 급기야 국민청원에 방영금지 가처분소송까지 제기되더니 광고협찬사들의 줄손절(?)로 이어졌다. 제작사 측은 "본 방송을 보면 오해가 풀릴 것"이라며 방송을 강행했지만 방영 후에도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제작·방송사의 판단이 안이했다. 1970~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선 수많은 민주인사와 젊은 학생들이 간첩으로 내몰려 희생되거나 고초를 겪었다. 5·18 등 과거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검증이 끝났는데도 간첩 개입설을 고집하는 세력이 건재한 이상 이들의 상처는 채 아물지 않았다. 하필 민주화운동이 절정이던 1987년 실제 간첩이 내려와 활동하고 여대생들이 간첩을 운동권 학생으로 오인해 돕는 설정이라니. 다수의 시청자가 불편해하는 이유다. 드라마를 그냥 드라마로 보기엔 우리 사회 '운동권=빨갱이'란 잘못된 낙인의 트라우마가 생각보다 깊다. 보다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 그래서 이 드라마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방영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엔 동의할 수 없다. 역사왜곡 논란을 이유로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가 방영 2회 만에 폐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지 9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네티즌들은 드라마 광고협찬사들을 압박했고 방송사는 무릎을 꿇었다. 드라마·영화 ·소설 신간을 두고 민원이나 소송을 제기하는 일은 비일비재하지만 광고·협찬사를 압박해 방영을 중단시킨 사례는 전례가 없다. '설강화'마저 '조선구마사'의 전철을 밟는다면 앞으로 문제(논란)의 소지가 있는 창작물은 무조건 퇴출하고 보자는 이른바 '대중검열'이 고착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작사든 방송사든 자기검열을 하게 되고 그만큼 창작의 자유는 위축될 게 뻔하다.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게임' '킹덤' 'D.P' '지옥' 등 전세계를 홀린 'K콘텐츠'의 저력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제작의 자율성에서 나왔다. 중국·일본 주변국 뿐 아니라 먼 대륙의 가치관과 문화코드까지 버무려 우리만의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비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미국은 상관없지만 중국 자본(풍)은 안 돼. 실존역사는 가급적 손대지 말고…. 상상력과 자율성을 옥죄는 자가검열 잣대들이 벌써 제작현장에 나돌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콘텐츠 제작 수준만큼이나 우리 국민들의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도 높아진 지 오래다. 특정 콘텐츠가 국민들에게 맹목적 가치관을 심어준다는 발상은 구시대적 검열논리에 불과하다. 'K콘텐츠'의 발전을 가로막는 독약은 잘못된 상상력이 아니라 갇힌 상상력이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베스트 클릭

  1. 1 나훈아 '김정은 돼지' 발언에 악플 900개…전여옥 "틀린 말 있나요?"
  2. 2 남편·친모 눈 바늘로 찌르고 죽인 사이코패스…24년만 얼굴 공개
  3. 3 동창에 2억 뜯은 20대, 피해자 모친 숨져…"최악" 판사도 질타했다
  4. 4 "욕하고 때리고, 다른 여자까지…" 프로야구 선수 폭로글 또 터졌다
  5. 5 계단 오를 때 '헉헉' 체력 줄었나 했더니…"돌연사 원인" 이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