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선생님은 문법 공부가 중요한 이유를 강조하면서 점점 흥분하더니 급기야 질문한 학생을 불러내 때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이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되지도 않은 질문을 하느냐’였다. 그날 이후 독일어 수업 때 질문하는 학생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제대로 된 토론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학생회의가 있긴 했지만 자유로운 토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인이 돼 사회생활 때 그 효과가 드러났다. 설득과 타협이라는 민주적 토론에 취약해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여차하면 감정이 격돌했다. 연공서열이 있는 조직의 사무실에서 열리는 토론은 리더의 훈시가 태반이고, 리더에 반하는 의견을 내거나 질문을 던지는 것은 신상에 불리하다.
그러나 퇴근 후 술자리는 토론이 대단히 활성화되는데 대부분 정치 이슈다. 둘 이상 모이기만 하면 정치 토론에 불이 붙는데도 정치 수준은 매우 낮다. 합리적 토론 문화의 부재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 한국 대통령 기자회견 때 문제가 되곤 했던 한국 기자들의 ‘질문 빈곤’ 역시 이런 문화 탓이다. BTS(방탄소년단),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지옥>, 영화 <기생충>이 세계를 주름잡는 데도 R&D 투자액이 세계 최고 수준인 과학계는 노벨상과 거리가 먼 이유도 이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의 속 뜻은 ‘나는 질문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문제에 대해 수시로 ‘왜?’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합리적 이성을 견지하고 역사의 진보를 지향한다. 결국 스스로에게 인간과 사회를 묻지 않는 『질문 빈곤 사회』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선진국을 구성하는 가치는 ‘존중, 인내, 정직, 친절, 연민’인데 모두 공동체 존속과 연관이 깊다.
엊그제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 센터가 17개 선진국 성인에게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가치가 무엇인지’ 조사한 결과 대부분 ‘가족’이 1위였는데 유일하게 한국만 ‘물질적 풍요’가 가족을 앞섰다. 빈곤한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옳고 그름을 떠나 진영과 증오만 판치는 대선정국도 그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
‘단일민족’을 문화적 자부심으로 내세워온 한국사회는 지극히 배타적이다. 그러나 21세기 지구적 화두는 ‘함께-살아감’이다. 나 혼자만, 내 가족만, 내 나라만 무사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하루빨리 한국을 받치는 인프라를 ‘질문풍요사회’로 구축하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필자의 말이 아니라 『질문 빈곤 사회』 저자 강남순 교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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